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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수필

3년전 KBS 인생극장 '프로포즈'편...

3년전 KBS 인생극장 '프로포즈'편...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아닌 인생극장의 프로포즈. 우연히 보게됐다. 리모콘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3초간격으로 돌리다 발견한 보석같은 휴먼다큐였다.


남자 68세. 여자 56세. 띠동갑. 그들은 반평생을 배우자 없이 지내왔다. 사별. 그런 인생을 살다가, 이제 만난지 9개월. 사랑이 싹트고 있었다. 다큐는 이미 5부작중에 3부까지 방영한 모양이다. 그러나, 주제가 사랑이다보니 호기심은 물론이거니와, 1-3부를 보지 않아도 대충 감잡을만큼 익숙했다. 사랑이니까.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 노인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 '죽어도 좋아'를 보지 못했는데,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들게끔 만들어준 휴먼다큐다.


20대초반의 풋사랑처럼만큼이나 그들의 사랑은 아름답게 그려졌다. 남자 휴대폰으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던 여자의 토라진 목소리와(할머니라 부르기 싫다) 남자의 애닯음. 휴대폰으로 수십번을 더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 여자의 휴대폰. 질투와 애증이 섞인 듯한 여자의 귀여운 짜증. 여자가 아버지산소에서 흘렸던 눈물은 잠시 스친 감동이었다. 진짜 감동은 아무 얘기없이 남자가 동서울터미널로 여자를 배웅나왔다는 것이다. 밤 9시 50분에. 설렁탕을 나눠먹으며 여자는 말한다.


"정말 믿어도 되죠? 이제 한번만 더 여자한테 전화오면 가만안둘 거예요."


30여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에게도 이런 대사가 먹힐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환상이라는 결혼생활에 대해, 또한 노년의 내 모습에 대해 잠시나마 거울같이 들렸던 말이다.


20대초반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다른게 없었다. 나이만 달랐을 뿐 그들의 연애편지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랑과 차이를 두지 않은 채, 여자의 목소리에 담겨져 크리스마스 이브날, 남자에게 보내졌다.


'사랑하는 **씨에게'로 시작하는 연애편지. 어려웠던 과거를 잊고 현재와 미래를 향해 새로운 흥분으로 행복을 만끽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나 또한 흐뭇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돋보기 사이로 눈물이 보였던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을 끄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않은 남자와 여자.


전 세계 60대 노인들이 주 1회 이상 섹스를 즐긴다는 통계가 떠올랐던 시점도 아마 그 때였다. 그 편지를 읽던 여자의 얇게 떨린 음성을 듣던 때.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도 생각나고... 만감이 교차했다.


사랑은 20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사랑은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 같다. 유치하게만 들릴 것 같은 연애편지를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에 느낄 수 있다. 다섯살 된 손녀딸 앞에서 이 옷 저 옷 몸에 맞춰보며 (맞선 보러 나가는 처녀총각의 웃음처럼) 여자는 남자의 아들내외와 인사하러 나가는 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보상자라지만, 가끔 시청료가 아깝지 않은 프로그램이 있어 좋다.
오늘 마지막회일 텐데... 못보지 싶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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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에 방영됐던 것 같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우연히 내가 쓴 이 글을 발견해 냈다. 그 다큐를 보고 쓴 글이다.


내가 책을 쉽게 빌려주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래된 일기장을 들춰보면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당시에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기도 하니까.


글이란 건 두고두고 곱씹으며 평생 적을 두어야 하는 매개인 가 보다.


텁텁함이 가득찬 오후에, 상큼한 딸기 한 입 배어 먹은 듯한 느낌이다.

 

20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