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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folio/일반기사[2003~2007]

[기획] 크리스마스 이야기

“메리 크리스마스”“메리 크리스마스!”“메리 크리스마스!!”
트리, 씰, 자선냄비, 구세군, 캐럴 등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전주곡들


이제 곧 연말연시다. 다사다난했던 2005년도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어떤 이는 크리스마스를 공휴일 하루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종교 차원을 떠나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나눔을 안겨주는 단어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추운 겨울이지만 오히려 따뜻한 마음이 충만한 이 때, 본지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자 한다. <편집자주>

■ 크리스마스의 어원
영어로 크리스마스는 Christmas라고 쓴다. Christ는 그리스도란 뜻이고, -mas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미사(Mass)를 뜻한다. 말 그대로는 그리스도를 기리는 날이다. 미사는 원래 라틴어이고(missa), 고대 영어에서는 mæss가 되어서 현재 Mass로 남은 것이다.
Mass는 원래는 가톨릭의 전례인 미사를 뜻하는 말이지만, -mas라는 형태로는 대체로 ‘축일, 축제일’이란 뜻이다. Mass가 나온 라틴어 missa는 ‘보내다’란 뜻의 mittere의 과거분사에서 나온 명사로 여기서 전례의식을 뜻하는 미사가 된 것은 명확하진 않지만, 대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미사를 끝맺으면서 퇴장시킬 때 Ite, missa est (Go, it is sent away)라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려하다

■ 크리스마스(성탄절)의 기원
크리스마스의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12월 25일 설은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짓날을 채택한데서 비롯됐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짓절(12월 24일-다음해 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로마 주교는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축제일인 동지를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했다.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부터다. 고대 로마 교회에서 기원한 크리스마스를 지키기 시작한 연대에 대해서는 335년 설과 354년 설이 맞서고 있다. 성탄일은 그 후 동방 교회로 퍼져나가 ‘콘스탄티노폴리스’(379년), ‘카파도기아’(382년)등에서 지키기 시작했고 교회력의 기원이 되었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서력기원의 시작이 되었다.
로마의 ‘액시그누스’(500~544)가 533년 부활절 표를 작성할 때 기원한데서 비롯된 서력기원의 기점인 그리스도의 탄생은 실제로 현재보다 4년이 앞당겨진다. 성서에는 예수님의 탄생 연도나 날짜의 기록이 전혀 없다.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한 최고의 기록이라는 안디옥 주교의 ‘데오필로스’ 기록(175~183)도 학자들 간에는 위작이라고 단정되고 있다.
그리스도와 미사가 합쳐 구성된 용어인 크리스마스 사건에 관한 성서적 근거로는 ‘마태복음 제1장’과 ‘누가복음 제2장’을 들 수 있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천사의 고지, 이상한별의 출현, 베들레헴의 말구유까지 박사들을 인도한 빛 등 그리스도가 인간이 된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크리스마스트리의 기원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한 유래는 몇 가지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하게 전해지는 유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탄에 널리 유행하는 ‘크리스마스트리’의 관습은 고대 애급에서의 동지제(冬至祭) 때의 나뭇가지 장식, 로마 축제 행렬에서의 촛불을 단 월계수 가지 장식 등 옛날의 성목(聖木)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유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정확한 유래로 전해지는 것인데, 독일의 마틴 루터 킹목사가 전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는 산길을 눈 쌓인 겨울밤에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두웠던 주위가 달빛에 밝아지면서 아름다운 빛을 전나무로부터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나무에 쌓였던 눈들이 달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을 비추게 된 것이다.
달빛에 반사되어 아름답기 그지없는 눈빛을 쳐다보든 루터 목사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섭리를 발견하고 집으로 전나무 가지를 갖고 와 장식을 하였다고 한다. 전나무 장식을 하면서 하얀 눈 대신 아름다운 꼬마전등으로 장식을 하여서 달빛에 반사된 눈빛을 대신하여 아름다운 트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요즘 크리스마스트리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쌓인 눈이 달빛에 반사되어 비추는 빛을 그리스도인의 역할로 생각하고 달빛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밝은 빛을 받아 다시 어두운 세상을 향해 반사 시켜 밝게 비추이는 게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며 밝은 등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담겨있는 진정한 뜻은 바로 반사되는 눈의 역할과 하늘의 광명(생명의빛) 의미다. 생명의 빛인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다시 세상을 향해 반사시켜 어두움을 밝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 크리스마스실의 유래
영국 산업 혁명 이 후 결핵이 전 유럽에 만연되고 19세기 말 덴마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천성이 착하고 어린이를 좋아하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우체국장이었던 아이날 홀벨(Einal Holboell)은 당시 많은 어린이들이 결핵으로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말을 기해 매일 같이 쌓이는 많은 크리스마스 우편물과 소포를 정리하면서 이 많은 우편물에 동전 한 닢짜리 ‘씰’을 붙여 보내도록 한다면 판매되는 자금으로 결핵으로 꺼져가는 수많은 어린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마침내 1904년 12월 10일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게 되었으며 국왕인 크리스천 9세도 적극 지원에 나서 그의 소박한 착상은 처음부터 많은 덴마크 사람들의 참여로 씰 모금 운동이 빛을 보게 됐다.
덴마크와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자 곧 스웨덴, 독일 및 노르웨이 등 주변국이 뒤따르고 1915년에는 루마니아에까지 전파되었다. 동양권에서는 1910년 필리핀이 처음으로 실을 발행하였으며 이어 일본에서는 1925년 12월에 자연요양사(自然療養社)라는 민간잡지사가 처음으로 실을 발행하였고 1926년부터 결핵예방회에서 본격적으로 실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세계 여러 곳곳에서 실운동이 성공을 거두자 1925년 이후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이태리 등 여러 유럽국가와 칠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 및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 중동지역의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고, 많은 나라에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므로 서 사랑과 나눔의 실천운동은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 한국의 크리스마스실
우리나라에는 1932년 12월 일제 치하에 캐나다의 선교의사인 셔우드홀(Sherwood Hall)이 처음으로 씰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893년 11월10일 당시 처음으로 평양에서 서양의학과 기독교를 전한 감리교 부부 선교사 의사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로젯타 셔우드 홀 (Rosetta Sherwood Hall)을 부모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결핵환자들과 일반 서민들을 돌보고 깨우치려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캐나다에서 의학공부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25년부터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다가 1928년 해주 결핵요양원을 설립했다.
셔우드 홀은 1932년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면서 발행동기를 첫째, 한국 사람들에게 결핵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둘째, 만인을 항결핵운동에 참여시키는 것, 즉 씰 값을 싸게 하여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 모두 사도록 하고 셋째, 재정적 뒷받침을 필요로 하는 결핵퇴치사업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고 회상했다.
1932년 이후 1940년까지 9차례에 걸쳐 실이 발행됐지만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그는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강제로 추방되어 씰 발행도 중단되었다. 셔우드 홀은 1991년 4월 5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98세로 타계하였고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부모가 묻혀 있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으며 그 해 9월 19일 역시 그 곳에서 타계한 부인 메리안 홀(Marian Hall) 역시 같은 장소에 안장됐다.
8.15 해방 후에는 1949년 과거 해주에서 셔우드 홀을 도왔던 문창모 박사가 주동이 되어 ‘한국 복십자회’에서 실을 발행하였고 1952년 ‘한국 기독 의사회’에서 실을 발행하였으나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범국민적인 성금 운동으로 착수된 것은 1953년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 부터다.
그 후 대한결핵협회는 매년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여왔는데 매년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은 물론 각계각층 인사와 학생 등 온 국민이 이 운동에 기꺼이 참여함으로 점차 결핵퇴치 재원모금운동으로 정착하게 됐다.
1988년에는 ‘세계 크리스마스 씰 전시회’를 세종문화회관에서 11월 3일부터 11월 8일까지 개최하였으며 같은 해 한국조폐공사에서는 화폐박물관 개관 때 ‘크리스마스 씰 상설 전시대’를 마련하여 한국의 실에 관한 역사적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은 '88, '89, '90, '92, '95, '96년에는 세계 크리스마스 씰 콘테스트에서 계속 1위에 입상한 바 있다.

■ 자선냄비의 유래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선냄비는 그 첫 종소리를 울리게 됐다. 도시 빈민들과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여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1천여 명의 사람들을 먹여야 했던 한 구세군 사관(조셉 맥피 정위)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누군가가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오클랜드 부두로 나아가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거리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써 붙였다. “이 국솥을 끊게 합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탄절에 불우한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웃을 돕기 위해 새벽까지 고민하며 기도하던 한 사관의 깊은 마음이 오늘날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매년 성탄이 가까워지면 실시하게 되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날 모든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타고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모든 이들에게 이웃사랑의 절실한 필요성을 되살려 주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 만들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1928년 12월 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준섭(조셉 바아) 사관이 서울의 도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불우 이웃돕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 구세군
1865년 7월 2일 런던에서 당시 감리교(監理敎) 목사이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가 창시하였다. '그리스도교 전도회(Christian Mission)'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방(路蒡)전도를 한 데서 시작했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기타 자선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했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하여 부스가 초대 대장이 됐다.
각 군국(軍國)에는 사령관이 있고 지역사령부에는 지역사령관이 있다. 또한 군국마다 각 지방을 관장하는 지방장관이 있으며, 각 지방에는 소속된 영(營)이 있어 담당 사관이 복음 선교와 예배, 지역사회 봉사사업을 지도한다. 영문(營門)에는 병사가 있는데, 이들은 구세군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의 죄악과 싸울 것을 다짐하고 병사로서 동참하고 있다.
국제규모의 복음전도와 각종 사회사업을 전개, 세계 80개국 나라에 1만 6000개의 전도센터가 있으며, 3,000여 개의 사회복지단체·기관·학교·병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도 1908년 영국에서 파견된 로버트 호가트(Robert Hoggard) 정령(正領)이 이끄는 10여 명의 사관이 선교사업을 시작한 이래, 그 교세를 확장하는 한편, 의료선교 및 고아원·양로원·육아원 등을 경영하며, 그밖에도 교육기관을 통해 포교에 힘쓰고 있다. 본부는 영국 런던에 있다.

■ 크리스마스 캐럴
크리스마스 때 부르는 신앙의 즐거움을 표현한 노래다. 보다 엄격히 말하면 캐럴은 절(V)이 하나의 후렴(B)과 교대하는 B, V1, B, V2……B 형식을 갖는 중세 후기 영국의 노래라 할 수 있다. 중세어 ‘carol’과 ‘carole’(프랑스와 노르망디 지방에서 사용)은 이교적 맥락을 지닌 민중적인 춤노래, 궁정의 춤이나 춤노래, 충성을 다짐하는 민중의 노래, 특정 양식의 다성 노래, 민중적인 종교 행렬을 의미했다.
영국 캐럴의 황금기(1350경~1550)에 대다수 캐럴은 유절 노래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14세기 초부터 본질적으로 민중적 종교 노래로 고정됐다. 당시의 많은 캐럴 선율과 500개 정도의 가사가 전래되고 있는데, 대개 성모 마리아나 아기 예수, 크리스마스 이후의 성인들의 축일을 기리는 것들이다.
그 밖에 가사 내용이 사랑이나 도덕, 풍자, 시사와 관련된 수난 캐럴과 부활 캐럴도 있다. 가사로 사용되는 시는 기교, 재능, 효과에 있어 뛰어나며 2개의 언어(보통 영어와 라틴어)를 함께 사용한 마카로니 캐럴이 많다.
15세기에 캐럴은 계속 대중적인 종교 노래로 남게 되며, 예술음악과 문학형식의 하나로도 발전했다. 음악적으로 캐럴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고정 형식’(forme fixe)으로서 프랑스의 롱도, 비를레, 발라드와 비교될 수 있다. 15세기의 캐럴은 영국 중세 음악 중에서도 상당히 비중 있는 음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5세기말 궁정 노래집 <페어팩스 필사본 Fayrfax Manuscript>에 실린 캐럴들은 2박 리듬에 토대를 둔 3, 4성부의 유연하고 세련된 양식으로 되어 있다. 주제는 대개 예수의 수난에 관한 것이며, 가사의 비중이 높아서 이것이 음악의 효과를 결정했다. 윌리엄 코니셰, 로버트 페어팩스, 존 브라운이 대표적인 캐럴 작곡가였다.
수십 년이 지나자 궁정 캐럴은 민중들로부터 비롯되었음이 분명한 대표적인 몇 곡만이 남게 되었는데 궁정 작곡가들의 가벼운 노래, 예를 들어 헨리 8세의 가 있다. 그러나 다성 캐럴은 전문 음악가들이 훈련받은 합창단을 위해 쓴 것이다.
이 후 캐럴은 급속히 자취를 감추어 종교개혁과 함께 완전히 소멸되었고, 대신 시편 찬송가가 등장했다. 캐럴은 18세기 후반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당시 최고의 크리스마스 찬송가인 찰스 웨슬리의 은 아직도 캐럴의 특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는 않았다.
캐럴의 부활은 전래의 ‘브로드사이드 곡집’(Collections of traditional broadsides)에 힘입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책에는 <첫 번 크리스마스 The first Nowell>·가 실려 있다. 캐럴의 또 다른 출처로 영국의 민요 캐럴인 와 번안 외국 캐럴을 번역한 (프랑스의 noel에 해당)이 있다.

■ 크리스마스카드
크리스마스 기간에 친밀감의 표시로 보내는 인사 카드이다. 영어권의 모든 나라들이 지켜온 이 관습은 다른 많은 나라로 전파됐다. 중세에도 동판화가들이 종교적인 주제들을 가지고 판화들을 만들었으나 오늘날 통용되는 용어로서 최초의 크리스마스카드는 1843년 영국에서 등장했는데, 런던에서 같은 카드 1,000장이 인쇄되어 판매를 위해 진열됐다.
이 카드 도안은 가족 파티에 관한 것으로서, 그림 아래쪽에는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중엽 뉴욕 올버니의 한 잡화점 주인이 ‘환상의 성전에 있는 피즈의 잡화점’이라는 이름으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담은 카드를 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