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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folio/일반기사[2003~2007]

[기획]추석(한가위)-“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풍년 기원한 강강술래 등 풍요로운 인심 ‘넉넉’


秋夕. 추석이라는 말만 들어도 행복하다?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이 여유로워 진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때가 바로 추석이 아닐까 한다. 고구려의 ‘진대법’ 시행 때부터 그랬듯이, 우리 삶에 있어 추석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봄에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던 배고픔을 가을의 풍요로움으로 갚는 지혜는 비단 우리만 갖고 있었던 ‘특허’는 아니었을 터.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중국의 중추절, 일본의 오본, 유태인들의 초막절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 의미도 매우 비슷하다. 한 해 동안 땀 흘린 노력의 결실을 보는 일이 비단 농부들의 마음만 해당되진 않을 것이다. 연초에 다짐했던 결심을 스스로 돌아보고 나지막이 그 결실이 익어가는 과정을 체크해 보는 시기라 생각해도 좋을 듯.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호에서는 풍요로움의 상징인 ‘추석’에 대해 면밀히 살펴봤다.


■ 추석의 의미
우리가 흔히 음력 8월 15일을 두고 ‘한가위’라 일컫는다. ‘큰 가운데’라는 의미의 한가위 즉, 8월의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쯤 되면 ‘한가위’의 어원이 궁금해진다.
‘가위’는 신라시대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길쌈’이란 실을 짜는 일을 말한다. ‘한가위’의 기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에 왕이 6부를 정하고 왕녀 두 사람에게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게 해 두 패로 가른 뒤, 편을 짜서 7월 16일부터 날마다 6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했다. 이 후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이 많고 적음을 살펴, 지는 편은 술과 밥을 장만해 이긴 편에게 사례하게 했다. 이것을 일러 ‘가배’라고 한다.
이 때 패배한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회소(會蘇)’하여 그 음조가 슬프고 아름다워 후에 사람들이 그 소리를 ‘회소곡(會蘇曲)’이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라가 6부로 나뉘어졌음은 지난 88년 4월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출토된 신라비석에서 밝혀졌다. 이 비석은 법흥왕 11년(524년)에 세워진 것으로 6부 중의 하나인 탁부 출신의 박사가 건립한 것으로 돼 있어 ‘가배’ 풍속의 진위를 확인시켜주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9세기 중엽 조선 순조때 학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 대표적인 추석 음식으로 ‘송편’을 꼽고 있다. 송편을 예쁘게 잘 빚어야 시집을 잘 간다고 해 여성들은 예쁜 손자국을 내며 반월형의 송편에 꿀, 밤, 깨, 콩 등을 넣어 맛있게 쪄냈다. 이 때 솔잎을 깔아 맛을 더했다.
또한 조선시대 가사인 <농가월령가>에도 신도주, 오려송편, 박나물, 토란국 등을 이 때의 시식이라 노래했으며, 송잇국, 고지국도 영동 지방에서 별식으로 먹은 것으로 적고 있다.
<동국세시기>와 같은 시대에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 <열양세시기>에 나오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유명한 말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 이는 천고마비의 좋은 절기에 새 곡식과 햇과일이 많이 나와 만물이 풍성하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이 밖에 한가위를 ‘반보기’라고도 했는데, 그 유래가 재미있다.
농사일로 바빴던 일가친척이 서로 만나 하루를 즐기는데 특히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 반나절 함께 회포를 풀고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겼다. 이를 중로상봉(中路相逢)이라 하여 ‘반보기’라 일컫게 됐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민족대이동이라 할 만큼 1천만 명 이상이 고향을 찾아 일가친척을 만나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있는데, 이 또한 ‘반보기’가 ‘온보기’로의 변천을 뜻하는 것은 아닐는지.

■ 추석의 민속놀이
추석에는 전국적으로 다양한 민속놀이가 계승, 발전되고 있는데 특히 호남 남해안 일대에서 행하는 강강술래와 경북 의성지방의 가마싸움이 유명하다. 또한 소먹이 놀이, 소싸움, 닭싸움, 거북놀이 등 농작의 풍년을 축하하는 놀이들이 곳곳에서 행해졌다.

▷ 소놀이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 등지에서 전승되고 있는 소놀이는 두 사람이 멍석을 쓰고 앞 사람은 방망이를 두 개 들어 뿔로 삼고, 뒷사람은 새끼줄을 늘어뜨려 꼬리를 삼아 농악대를 앞세워 이집 저집 찾아다니는 것으로 시작됐다. 일행을 맞이하는 집에서는 많은 음식을 차려 이들을 대접하며 마당에서 술상을 벌이고 춤과 풍물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는데, 오늘날의 농악대를 생각하면 된다.
소놀이를 할 때는 마을에서 일을 잘하는 머슴을 뽑아 농우에 태워 마을을 누비고 다니는 일도 있었는데, 상머슴에 뽑히면 여름 동안 수고가 많았다는 위로와 다음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고.

▷ 줄다리기
마을 사람들은 추석 때 서로 모여 줄다리기도 했다. 마을에서 편을 가르거나 마을끼리 대항전을 치르기도 했는데, 큰 줄을 만들려면 많은 볏짚이 필요해 각 집에서 짚단을 내어 만들기도 했다.
줄다리기의 승부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해 보통 암줄(수줄과 암줄을 서로 고끼워야 줄다리기용 줄을 만들 수 있다)이 이기면 풍년이 드는 것으로 해석했다. 줄다리기는 추석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초와 단옷날에도 하는 농경의례의 하나다.

▷ 강강술래
전남과 서남해안 지방에서는 부녀자들이 강강술래 놀이를 즐겼다. 추석날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달이 솟을 무렵, 젊은 부녀자들이 넓은 마당이나 잔디밭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노래는 처음에는 느리게 부르다가 나중에는 뛸 정도로 빨라진다.
강강술래는 손을 잡고 일렬로 서서 맨 앞 사람이 다음 사람의 팔 밑으로 꿰어가는 고사리꺽기, 몇 번이고 도는 대로 한 덩어리로 뭉치게 되는 덕석몰이, 원을 그리면서 춤추는 중앙에 한 사람 혹은 두 세 사람이 뛰어 들어가 두 손을 내두르며 뛰고 춤추는 남생이놀이 등 노래장단에 따라 춤 동작도 달라진다.
이 놀이는 원시시대 때 연중 가장 밝은 보름달을 맞이해 놀이하던 원무를 이순신 장군이 의병술로 채택해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퇴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 가마싸움
추석이 되면 서당에서는 훈장이 차례를 지내기 위해 귀향에 올라 공부를 며칠 쉬게 된다. 이 때 글공부에서 해방된 학동들은 모여서 놀이를 하는데, 그 중에 가마싸움과 원놀이가 있다.
학동들이 모여 나무로 가마를 만들어 바퀴를 달고 이웃 마을의 서당과 경기를 한다. 서로 가마를 갖고 넓은 마당에 모여 가마를 끌고 뛰어나와 상대편 가마와 부딪혀 먼저 가마가 망가지면 진다. 아무리 부딪혀도 가마가 성하면 이기게 된다.

▷ 원놀이
원놀이 역시 훈장이 없는 사이 학동들에 의해 행해지는 놀이다. 오랫동안 배워 글을 잘하고 재치 있는 사람을 뽑아 원님으로 정하고 학동 중 소송을 하는 사람과 소송을 당하는 사람을 선정해 나눈다. 이 때 원님이 판관으로서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놀이다. 오늘날의 모의재판과 같다고 보면 된다.
옛날에는 과거에 급제해 관원이 되면 판관으로서 민원을 처리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사리를 따져 정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했다. 그 예행연습을 원놀이에서 미리 했던 것이다. 이처럼 원놀이는 서당의 학동으로서는 품위 있고 학술 연마도 되며 지혜를 연마하는 알맞은 놀이라 할 수 있다.

▷ 콩서리
농촌의 소년들 사이에는 추석 때 콩서리를 하는 일도 있다. 콩을 통째로 꺾어 불을 피워 그 속에 넣어두었다가 익으면 꺼내 먹는다. 밭콩보다는 논두렁콩이 더 맛이 좋아 초가을에 흔히 행해졌다.

■ 추석의 민간 행사
전남 진도에서는 추석 전날 밤 아이들이 밭에 나가 벌거벗고 고랑을 기어 다니는 풍습이 있었다. 밭둑에다 음식을 차려놓고 토지신을 위한 일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밭곡식이 풍년들어 많은 수확을 올릴 뿐 아니라 아이들의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건강해진다고 믿었다.
또한 ‘올게심니’라는 풍습이 있는데, 그 해의 농사에서 가장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의 곡식의 목을 골라 묶어 기둥이나 방문 위, 벽에 걸어놓았다. 이렇게 하면 그 곡식들이 다음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으며, 이 때 떡을 하고 술도 빚고 닭도 잡아서 잔치를 여는 경우도 있었다. 올게심니를 한 곡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먹지 않았으며, 다음해 종자로 쓰거나 조상의 사당에 바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농경문화가 주를 이뤘던 우리 조상들은 풍년을 항상 기원하기 위해 주술 행위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행사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엌의 부뚜막에는 조왕(부엌신)이 있다고 믿었다. 조왕은 불과 재산을 담당했다고 한다. 속설에 의하면, 조왕은 섣달 스무 닷샛날(음력 12월 25일)에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1년 동안 집 안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한다. 그러고 나서 그믐날(음력으로 제일 마지막 날)에 제자리로 돌아온다.
각 가정에서는 이러한 조왕을 모시기 위해 사발에 물을 떠서 밥솥 뒤쪽에 놓아두곤 했는데, 특히 추석에는 조왕을 위해 정화수를 준비했다. 부지런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아낙네들은 매일 물을 갈았으며, 초하루와 보름날 두 번 갈아주는 집도 있었다고.
추석을 전후해 햇곡식이 나오면 장독대에 정한 짚을 깔고 떡과 미역국, 무나물, 배추나물, 고기, 탕을 차려놓고 ‘성주모시기’를 행했다. 방에 차려놓는 경우도 있었는데, 성주는 가신(家臣) 중에서 어른에 속하고 주인의 명복과 관계가 있어 매우 소중하게 모셨다.
또한 추석에는 그 날의 날씨를 보고 여러 가지 점괘를 냈다. 추석의 일기가 청명해 밝아야 좋다고 전해진다. 비가 내리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불길하게 여겼다. 밤에 구름이 끼어 달빛을 볼 수 없으면 보리와 메밀이 흉년이 들고, 토끼는 임신을 못해 번식을 못하고 개구리가 알을 낳지 못한다고 했다.
아울러 우리 조상들은 추석날 밤에 흰 구름이 많이 떠 있으면 농작물이 풍년이 들지만, 구름덩이가 많거나 구름이 한 점도 없으면 그 해의 보리농사는 흉년이 든다고 해석했다.
경남 지방에서는 8월에 창문을 새로 바르지 않는데, 이는 도적을 맞는 일이 생기고 집안에 우환이 들끓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름철 바람에 창호지가 찢어지면 그대로 시원하게 뒀다가 9월에야 문을 새로 발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