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rtfolio/일반기사[2003~2007]

[기획]테마칼럼 - 열정으로 산 사람들

[기획]테마칼럼 - 열정으로 산 사람들
황무지 시대에 꽃피운 열정의 의인들
주시경, 웹스터, 오사무 … 공통분모는 ‘열정’


▲ 주시경 - 애욕의 세월, 한글 연구로 승화
주시경은 일본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구한말에 태어났다. 그는 국어와 한글 연구를 통해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워 보려고 평생 필사적으로 노력한 선각자다. 주시경은 1914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갑자기 타계하기까지, 명석한 분석력을 가진 국어학자로서 사랑과 열정을 가진 스승으로 그리고 용감한 애국계몽운동가로서 한시도 쉬지 않았다.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외세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밀려들어오던 때였다. 그는 상주가 본관으로 백운동 서원을 세운 유학자 주세붕의 후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엇인가 이루려는 열정이 대단했다. 그가 가진 진취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일화가 있다.
주시경이 여덟 살 때인 어느 봄날, 서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놀던 어린 주시경은 멀리 있는 산이 하늘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자, 친구들에게 산에 올라 하늘을 만져 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산에 올랐고 이들이 산 중턱에 이르자 그야말로 만발한 꽃밭이 펼쳐졌다.
그의 친구들은 아름다운 꽃에 정신이 팔려 당초 뜻을 이루려던 일은 까맣게 잊게 됐다. 그러나 선생은 홀로 험한 산을 올랐고 결국 산 정상에까지 이르렀다.
산과 맞닿아 보이는 하늘을 만져 보겠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단순하고 유치한 발상 같기도 하지만, 어린 나이에 그는 이미 사물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았고, 자기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이 있었기에 후일 황무지와 같던 국어학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학문은 한문이었다. 한문을 배워야 사람구실을 하고 또 벼슬도 하여 출세를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한문 공부에 열중했고, 주시경 역시 어린 시절을 한문 공부로 보냈다. 처음에는 훈장을 하는 부친에게서 배웠고, 이후 여러 훌륭한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한문을 수학했다. 그가 국어와 한글 연구에 뜻을 세우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다.
주시경은 입으로는 우리말을 하면서 글은 중국 것을 사용하는 당시의 상황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국어와 국자 연구에 뜻을 세우게 됐던 것이다.
이처럼 주시경은 그 자신이 태어날 무렵부터 서거한 1914년은 한일합방이 이뤄져 나라가 망한 직후였다. 따라서 주시경은 그 당시 우리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목전에서 지켜봤고 이에 대한 울분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러한 울분과 국권을 지켜내려는 주시경의 노력과 모든 행적은 국어와 한글 연구에 큰 의지로 반영돼 나타났다. 실제 주시경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 틈틈이 그들의 민족정신을 일깨웠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백두산에서 아름드리나무를 강제로 베어 도적질 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주시경은 국어교사로 임할 때 백두산에 대해 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백두산의 산림을 베어 통나무로 뚝뚝 끊어 싣고서 동청 철도로 달아날 때에, 그 때 차장이 누구던가요?”
“백두산의 나무를 베어 조그마한 배를 모아 서해에 띄워놓고 둥덩실 내려올 제, 바라보니 금수강산이로구나. 주인이 누구요?”
당시 교실 안은 침묵에 잠겼고 학생들은 불타는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손에 땀을 쥐었을 것이다. 주시경은 이렇게 깊게 잠든 민족의 혼을 깨워 주려고 노력했다.

▲ 데즈카 오사무 - 만화에 바친 열정
만화는 그림과 글로 상황을 묘사하는 대중정보전달 매체로서 글 혹은 그림만으로 된 표현 매체에 비해 이해력과 풍자성이 뛰어나 아동용 명랑만화에서부터 성인용 시사만화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폭넓고 다양하다.
만화는 20세기 접어들면서 세계 각국의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정착하게 됐고, 일본은 1950년대 이후 만화산업강국으로의 자리를 굳히게 되는데 그 견인차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데즈카 오사무’다.
‘우주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 ‘사파이어 왕자’ 등의 초기 작품이 우리나라에도 알려져 있지만, 이 정도로 데즈카의 사상이나 철학을 논할 수는 없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국제사회로부터 전범국가로 낙인이 찍혀 패배주의와 무기력함, 인간성 상실의 황폐한 시대를 살고 있었던 일본인들에게 전쟁 부정과 화합, 생명의 소중함, 인간과 자연의 공존, 지구의 미래 등의 메시지를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일본이 서구와 대등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무한한 상상과 꿈을 간직하게 해 줬고 이후 40여 년간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받쳐 왔다.
이러한 데즈카는 전쟁 후 만화를 주도해 만화를 단순 오락물에서 본격적인 문화예술 장르로 승화, 정착시켰다고 평가받으며 일본인들에게 ‘만화의 신’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그는 거의 모든 장르의 애니메이션에 도전하여 기획, 제작, 방영, 스폰서, 머천다이징 등과 같은 영역의 애니메이션 시스템을 개척하고 정착시킨 공로로 ‘아니메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이러한 애니메이션 계에 있어서의 막대한 공적으로 디즈니와는 달리 사업가나 경영자로서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음에도 ‘일본의 월트 디즈니’라고 소개되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그에게 ‘쇼와시대 최고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칭호도 달아 줬다.
베레모가 트레이드마크였던 데즈카는 의학박사, 문필가, 프로듀서, 영화감독 등의 여러 직함을 가졌음에도 만화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가히 전설적이라 할 만큼 활동적이었고 생전에 17만장의 만화를 그리고 700개나 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작품에 의한 영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외에도 데즈카는 전후의 혹독하고 처절했던 상황에서도 자신의 꿈인 만화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 개업의 자격증을 소지한 의사였음에도 편안한 의사의 길을 가지 않고 당시로서는 평가받지 못하던 만화가가 되기로 한 용기, 인기 만화가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자세 등 만화가로 일관된 그의 치열했던 삶은 그 자체로써 젊은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 노아 웹스터 - 미국 영어의 아버지
수많은 영어 사전 중에서 사전편찬자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경우는 아마 미국인 노아 웹스터(Noah Webster)일 것이다. 대부분 미국 가정에 웹스터 사전 하나씩은 있으니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의 일부분을 이루는 ‘웹스터’라는 이름은 ‘사전’이라는 단어와 거의 동의적으로 쓰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사전편찬자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여든 다섯 해라는 짧지 않은 생애동안 웹스터는 사전 편찬 이외에도 교육, 법률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이뤘다. 특히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독립 초기 미국의 문화적 독립을 위해 힘을 쏟았고 사전 편찬도 그것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철자, 읽기, 쓰기와 마찬가지로 말하기도 교육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미국 국민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데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믿었다. 이에 웹스터는 딜워스의 교본을 포함해 그 때까지 사용됐던 철자 교본들은 철자, 말하기, 쓰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
웹스터가 언급하는 바와 같이 실로 영어 철자의 발음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철자의 발음보다 더 변덕스럽고 불규칙하다. 하나의 모음이나 자음 철자가 여러 가지로 발음되기도 하고 또 한 가지 소리가 여러 방법으로 표기되기도 하므로 읽기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발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웹스터는 미국 어린이들에게 읽고 쓰고 말하기를 가르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마침내 1782년 철자교본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 책에 있는 방법을 자신의 수업에서 시도해 성공을 거뒀으며, 학생과 학부모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이리하여 그 책의 가치를 확인한 웹스터는 그것을 출판하기로 결정하는데 그 전에 우선 이 노력의 산물이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을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독립 전에는 1710년에 제정된 영국의 저작권법이 미국에서 유효했으나, 독립된 상태의 미국에는 그 법을 대체할 새로운 저작권법이 아직 없었다. 그래서 웹스터는 같은 해 8월말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를 찾아갔다. 대륙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작권법 제정의 필요성에 동의하기는 했으나, 연방규약 때문에 대륙회의 자체에서 법을 제정하고 발효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대륙회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각 주가 자체적으로 저작권법을 제정하도록 권고하는 것뿐이었다.
이에 웹스터는 직접 각 주 의회를 찾아다니기로 마음먹고 펜실베이니아 주, 뉴저지 주, 커네티컷주의 의회를 찾아가지만 회기 중이 아니거나 법안을 상정할 시기가 이미 지나 있어 당시에 저작권법의 제정에 이르지는 못했고 미국 최초로 저작권법이 제정되기까지는 이로부터 수년이 걸렸다. 저작권법의 제정에 대한 그의 청원은 미국에서 최초로 행해진 것으로 이 때문에 웹스터는 ‘미국 저작권법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이렇듯 웹스터는 자신의 노력의 산물로 사전을 출판할 출판업자를 찾기 시작해 뉴욕의 셔면 컨버스와 계약을 맺었다. 셔먼 컨버스는 계약을 하자마자 독일에 사람을 보내 사전의 인쇄에 필요한 귀한 활자체를 구해왔다. 사전의 인쇄는 1827년 5월 시작돼 웹스터의 70세 생일 직후인 1828년 11월 마지막 페이지가 끝났다.
‘미국 영어 사전(An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이라는 이름의 이 사전은 폭 9인치에 길이 11인치 크기의 각 800페이지짜리 두 권으로 이뤄져 있었고, 한 질의 가격은 20달러였다.
나라 전체에서 찬사가 들려왔다.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평범한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환영을 받게 된 웹스터는 이제 미국의 영웅이었다. 심지어 그 동안 그를 비방했던 신문들도 그를 ‘미국의 소중한 웹스터 박사’라고 불렀다. 연방의회와 주 의회, 법원들이 그의 사전을 공식 표준 사전으로 채택했으며 외국 정부들도 그의 사전을 공식 영어사전으로 채택했다. 저명한 판사였던 제임스 켄트는 미국 역사에서 웹스터의 위치가 컬럼버스나 워싱턴과 견줄 만 하다고 했다.
‘영국 교육학회지’에서는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전편찬자’라고 불렀으며 프랑스 왕립과학원은 그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웹스터는 마침내 미국영어의 아버지로 우뚝 서게 됐다.
이러한 웹스터의 ‘미국 영어 사전’은 그 때까지 만들어진 어떤 사전보다도 더 방대하고 훌륭한 사전이었다. 수록된 단어의 수도 8만개나 됐고 단어의 종류도 다양했으며, 그 이전의 사전들보다 의미도 더 정확하게 기술됐다. 그리고 발음도 알기 쉽게 표기돼 있었고 어원에 대한 부분도 그 이전의 사전들보다 훨씬 잘 돼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한 단어의 용법이 영국과 미국에서 서로 다른 경우 그 차이를 명기해 줬으며 구어적인 표현이나 관용적인 표현들도 수록했다.
1829년 영국인 에드먼드 헨리 바커는 그의 사전을 영국에서 출판하겠다고 나섰다. 20년 전 웹스터가 사전을 쓰기 시작하던 때와는 대조적으로 영국 출판본을 위해서는 케임브리지 대학, 옥스퍼드 대학을 비롯한 많은 기관과 개인이 구입 예약을 했다.
1830년에 출판된 영국판 제목에는 ‘미국’이 빠지고 ‘영어사전’으로 바뀌었으며, 웹스터가 원본에 썼던 서문도 빠졌다. 요즘도 ‘출판되는 책의 목록’에 따르면 웹스터라는 이름을 붙인 책이 50권 이상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