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갑니다.
길을 나서며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걸을 수 있을까라는 것. 한발 내딛습니다. 또 한발 내딛습니다. 두발째 들어서야 흔들리지 않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봅니다.
한방울 두방울. 그래, 이것을 난 그리움이라 부르기로 했지. 뭔가 탐탁지 않았을 때 내는 '소로록'하는 소리. 그것은 우산을 펴는 소리가 아니라 그리움이 가득 채워졌을 때 내는 얇은 신음소리 쯤으로 여겨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길에 나선지 몇분이 지나서야 제대로 파악하게 됐습니다. 흙먼지를 일으키는 버스 뒤에 서서 매연 냄새에 코를 댑니다. 어린 시절 뱃속에 회충이 있다고 느끼며 버스 꽁무니를 쫓아가던 때가 아련합니다.
다시 길을 걷습니다. 길을 걷다가 저 멀리서 희뿌옇게 어떤 형상이 제게 손짓을 합니다. 반기는 듯 합니다. 알은체를 합니다. 저도 손을 들었습니다. 다시 손을 내립니다.
오늘 하루 종일 하늘에선 그리움을 제게 쏟을 작정인가 봅니다. 흔들림 없이 걷는 것도 이제 익숙해 졌습니다. 흔들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익숙해 진 것처럼. 이젠 입가에 밥풀도 묻히지 않고 밥을 잘 먹습니다. 제대로 손가락을 펴서 찌개도 입에 훌훌 털어넣습니다. 달콤함도 알고 매운맛도 이젠 알게 됐습니다. 하늘에서 그리움이 그렇게 쏟아져내려도 이제는 내 눈에 눈물이 맺히지 않습니다.
언제였던가요. 예쁘게 포장된 길을 걸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발... 또 한발. 흔들림없이 걸었었지요. 좌우로 약하게 펼쳐진 그림자 사이로 제 걸음은 나름대로 힘차게 펄럭이는 동사무소의 태극기 같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흔들림없이 걸었던 마지막 걸음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요. 지금도 흔들림은 없지만, 예전 그 발 모양이 아닙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속을 걷는다면 확실히 보여드릴텐데... 아쉽네요. 그래도 보여드릴 순 있습니다. 지금 제 발 끝을 잘 보세요. 이 것은 발이 아닙니다. 그렇죠?
제게 물으셨나요? 무엇을 물으셨나요? 그리움은 무엇이고 흔들림은 무엇이냐고 물으셨나요?
예쁘게 포장된 길 위에서라면 난 당신에게 그것들을 모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발이 아닌 다리로 걷고 있기에 당신에게 아무런 얘길 해드릴 수가 없답니다. 너무나 우울하겠지요? 하늘에선 하루 종일 그리움을 쏟아내고 있으니 더욱 기분이 그러하네요.
온 세상은 이 조그만 골목에서 시작되는 지도 몰라요. 모든 곳이 길로 연결돼 있으니까요. 한참을 걷다보면 결국 내가 갈 곳은 이 곳이라는 것을 이제는 깨닫습니다. 멀리 달아나려 해도 달아나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오는 절망감. 제게 말씀하세요. 예쁘게 포장된 길 위에서 힘차게 내달려보라고.
늦었답니다. 늦었어요. 아니, 너무 빠른지도 모르지요.
달려가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해 목적지로 갈 뿐입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천천히라도... 조금씩이라도 걷고 있으니까요. 쓰러져서 두 동강 난 심장 언저리를 매만지며 걷던 때가 엊그제 같긴 하지만요. 괜찮습니다. 부축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에 젖은 강아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런 눈빛... 이제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빠르진 않지만 그래도 이제 제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으니까요.
저 멀리서 조그만 손을 흔드는 사람을 보아도, 이제는 쉽게 웃으며 쉽게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제게 보낸 따뜻함들...
2003. 5. 7.
길을 나서며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걸을 수 있을까라는 것. 한발 내딛습니다. 또 한발 내딛습니다. 두발째 들어서야 흔들리지 않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봅니다.
한방울 두방울. 그래, 이것을 난 그리움이라 부르기로 했지. 뭔가 탐탁지 않았을 때 내는 '소로록'하는 소리. 그것은 우산을 펴는 소리가 아니라 그리움이 가득 채워졌을 때 내는 얇은 신음소리 쯤으로 여겨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길에 나선지 몇분이 지나서야 제대로 파악하게 됐습니다. 흙먼지를 일으키는 버스 뒤에 서서 매연 냄새에 코를 댑니다. 어린 시절 뱃속에 회충이 있다고 느끼며 버스 꽁무니를 쫓아가던 때가 아련합니다.
다시 길을 걷습니다. 길을 걷다가 저 멀리서 희뿌옇게 어떤 형상이 제게 손짓을 합니다. 반기는 듯 합니다. 알은체를 합니다. 저도 손을 들었습니다. 다시 손을 내립니다.
오늘 하루 종일 하늘에선 그리움을 제게 쏟을 작정인가 봅니다. 흔들림 없이 걷는 것도 이제 익숙해 졌습니다. 흔들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익숙해 진 것처럼. 이젠 입가에 밥풀도 묻히지 않고 밥을 잘 먹습니다. 제대로 손가락을 펴서 찌개도 입에 훌훌 털어넣습니다. 달콤함도 알고 매운맛도 이젠 알게 됐습니다. 하늘에서 그리움이 그렇게 쏟아져내려도 이제는 내 눈에 눈물이 맺히지 않습니다.
언제였던가요. 예쁘게 포장된 길을 걸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발... 또 한발. 흔들림없이 걸었었지요. 좌우로 약하게 펼쳐진 그림자 사이로 제 걸음은 나름대로 힘차게 펄럭이는 동사무소의 태극기 같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흔들림없이 걸었던 마지막 걸음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요. 지금도 흔들림은 없지만, 예전 그 발 모양이 아닙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속을 걷는다면 확실히 보여드릴텐데... 아쉽네요. 그래도 보여드릴 순 있습니다. 지금 제 발 끝을 잘 보세요. 이 것은 발이 아닙니다. 그렇죠?
제게 물으셨나요? 무엇을 물으셨나요? 그리움은 무엇이고 흔들림은 무엇이냐고 물으셨나요?
예쁘게 포장된 길 위에서라면 난 당신에게 그것들을 모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발이 아닌 다리로 걷고 있기에 당신에게 아무런 얘길 해드릴 수가 없답니다. 너무나 우울하겠지요? 하늘에선 하루 종일 그리움을 쏟아내고 있으니 더욱 기분이 그러하네요.
온 세상은 이 조그만 골목에서 시작되는 지도 몰라요. 모든 곳이 길로 연결돼 있으니까요. 한참을 걷다보면 결국 내가 갈 곳은 이 곳이라는 것을 이제는 깨닫습니다. 멀리 달아나려 해도 달아나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오는 절망감. 제게 말씀하세요. 예쁘게 포장된 길 위에서 힘차게 내달려보라고.
늦었답니다. 늦었어요. 아니, 너무 빠른지도 모르지요.
달려가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해 목적지로 갈 뿐입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천천히라도... 조금씩이라도 걷고 있으니까요. 쓰러져서 두 동강 난 심장 언저리를 매만지며 걷던 때가 엊그제 같긴 하지만요. 괜찮습니다. 부축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에 젖은 강아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런 눈빛... 이제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빠르진 않지만 그래도 이제 제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으니까요.
저 멀리서 조그만 손을 흔드는 사람을 보아도, 이제는 쉽게 웃으며 쉽게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제게 보낸 따뜻함들...
2003.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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