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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수필

국민학교 6학년때 보았던 그 잿빛 하늘.(2002)

그랬다. 그 하늘. 미아초등학교 5층 건물 꼭대기에서 창문을 열었다. 아마 이 맘때쯤 일 것이다. 토요일 오후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늘은 곧 우뢰와 같은 눈물방울을 쏟아냈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하루 종일 하늘 빛을 다 집어삼킬 만큼 굵은 줄기를 뱉어냈다.

비가 그쳤을 때는 모두 떠나고 없는 교실에서 혼자 마룻걸레를 만지작 거렸다. 하늘을 봤다.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 눈을 뜨니 잿빛 구름이 온 하늘을 감싸다 못해 교실 안 내 어깨까지 내려앉았다. 만지작 거리던 걸레를 놓쳤던 건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5층에서 바라본 학교 운동장. 황토빛 물줄기를 땀 흘리듯 씻어내는 저 젖은 흙밭에 누워보고 싶었다. 비를 온 몸으로 맞고 싶었다. 부시시한 머릿결처럼 나부끼는 플라타너스나무의 흔들림처럼. 그런데, 비가 그쳤다.

그나마 하늘이 있어 다행이었다. 하늘. 잿빛. 포도주빛을 알았더라면, 당시 나는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포도주를 한번이라도 마셔봤더라면. 붉은 빛이 도는 건 노을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주대낮에 이런 하늘이 연출된다는 데 나는 꽤 흥분했다.

포도주 두세방울을 칵테일 스카이블루에 떨어뜨린 느낌이랄까. 번져나가는 모양새가 꼭 무언가를 갈망하는 가을의 남자와 닮았다.

비가 그치긴 했지만, 잿빛 하늘은 형형색색 우산을 들고 딸아이를 마중나온 어머니의 그 어깨에 곧 눈물을 쏟아내곤 한다. 아이의 웃음속 행복함을 시기하는 늙은 창부의 넋두리처럼.

아마도 그 비를 맞고 싶어 계단을 뛰어내려갔을 것이다. 기억의 끝자락이 어깨에 머무른 잿빛이었다면, 이어진 기억의 필름은 황토빛 젖은 흙밭이었기 때문이다. 뚫고 나오려는 엄지발가락을 사이에 둔 하얀 운동화 속은 이미 물길과 같았다. 뻑뻑해진 기계에 기름을 치듯 발과 운동화 사이에는 그런 공존의 노래가 들리고 있었다.

심호흡. 휴... 맑은 공기가 폐부까지 꽤뚫고 들어가니, 하늘에 올라선 느낌이었다. 비가 그쳐 내 손엔 더 이상 우산이 들리지 않았지만, 저 하늘을 우산삼아 거들고 싶었다. 한참을 뛰었다.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까. 잠시 생각이 거기에 머물자, 놀이터에서 가장 높은 곳을 눈에 넣어 손에 잡았다.

하늘에 손을 뻗고 기분 좋게 잿빛을 마셨다. 포도주를. 잿빛 포도주를. 그 때 내나이 열세살이었다. 포도주에 물든 하늘과 얼굴은 곧 동병상련이라도 되는 듯,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어머니가 보고플 때마다 흘렸던 그 눈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빗물과 섞여 이것이 내 눈물인지도 모를만큼 젖어 정신이 혼미했을 뿐이다. 가방속에서 딸그락 거리는 빈 도시락 뚜껑속의 숟가락만이 내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창가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보다 창가에서 내뱉는 내 눈물소리가 더 크리라.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건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후 였다.

...

오늘 그런 하늘이 연출되고 있다. 그것도 백주대낮에. 20여년전 보았던 그 하늘을 되새겨내며 잠시 감상한다. 그 때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이미 커버린 내 눈을 보면서, 잿빛과 어우러진 플라타너스나무와 포도주를 떠올려 본다.

세상 모든 사람의 머리위에 떠 있는 그 빛깔 하나로 인생을 갈라놓고, 마음을 나눠놓는 것에 비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좋다. 이 빛깔이 나는 좋다.
 
2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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