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팬티는 예뻤다. - 1997
가을날의 한가로움을 만끽하며 친구들과 술을 한잔했던 어느 늦은 겨울 날.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지하철에 오르며 내가 느낀 것은 얼굴이 빨갛다라는 것. 원래 술 한잔만 들어가도 얼굴이 빨개지는 나로서는, 환한 형광등의 지하철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의 빨간 몰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마침 자리가 있어서 얼굴을 가릴 것도 없이 의자에 주저앉고는 잠을 자는 척 -처음엔 '척'을 하려고 했다- 하며, 눈을 지긋이 감고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아무 소리도 들릴 것이 없었다.
일은 그 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짧았다. 이렇게 짧은 것은 봄이 오는 시점에선 조금은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야 자신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기에 난 그저 감상만 하면 그 뿐. 그녀는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수많은 문(門)중에 또한, 그 수많은 자리 중에 왜 나의 앞에 섰을까. 난 아무런 연관을 짓지 않았다. 연관이 시작되면 생각을 해야 되고, 생각을 하면 또 머리가 아파 오니깐.
하얀 허적다릴 드러낸 이 여자는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어폰을 잠시 뒤로 젖히고는 귀를 세웠다. 귀를 아무리 세워도 지하철의 소음으로 아무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소음문제까지 들먹일 재간이 되지 않은 터라, 그저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에 껌을 씹고 있던 그녀는 내가 내리기까지 내내 앞을 지키고 있을 작정인 것 같았다.
지하철을 하도 많이 타고 다니면, 앉아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어느정도 예지능력이 생긴다. 어디정도에서 내릴 것이다라는. 그래서, 그 자리 앞에 앉으면 영락없이 판단에 서광이 비춘다. 적어도 2-3정거장밖엔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몸을 약간 좌우로 흔들면 내리기 2정거장전쯤이고, 머릴 옆으로 돌려 역간 판을 보면, 적어도 5정거장이내엔 내린다. 또, 책을 읽거나 신문을 뚫어져라 보는 사람들은 아예 앞에 서지 말아야 한다. 열정거장 이상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지 능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일 동안 갈고 닦은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난 잠시 술기운에 눈을 감았다. 얼마나 왔을까. 뭔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입가에. 일단, 눈을 살포시 떴다. 서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은 됐다. 이번엔 앉아있는 사람. 내 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말 다행이다.
난 하도 창피해서, 얼른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곤 하품하는 척을 했다. (이번에도 또 '척'이다) 난 하품하는 척을 하며 입을 쓱 닦았다. 잠을 잘 때 침을 흘리는 나의 버릇이 안방인줄 알고, 그만 술기운에 해버렸던 것이다.
다행히 손바닥 하나로 다 닦을 수 있었다.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느니라. 가방 위로 흐르는 것은 물기인 척, 손으로 가리고 입가에 물기가 있는지 없는지 다시 한번 손을 가져다 댔다. 없었다. 뽀송뽀송했다.
그렇게 난 쪽팔림을 모면하고 있는 동안에 많은 변화가 나의 앞에선 벌어졌다. 그녀가 나의 앞에 있다가 나의 앞자리에 앉아 버린 것이다. 앉은 것 까진 좋았다. 그렇게 짧은 것을 하고는 다릴 꼬고 있었다. 허벅다리는 물론이고 그 안의 그 무엇을...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보고 싶은 맘도 없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키 175cm정도의 흔한 말로 '어디내놔도 빠지지않는' 슈퍼모델 정도의 미인이었다. 다리를 이 청아한 날에 다 내놓고 다니는 것을 보면, 여름엔 어떨까라는 짐작이 머릴 스쳤다. 그렇게 지하철 뭇 남성들의 눈요기 거리를 제공해준 그녀는 나와 같은 신도림역에서 내리려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 이럴 수가. 혹시! 우리동네에 사는 사람은...?? 아니겠지. 그럴 리 없어.
그녀는 유유히 모델 같은 워킹으로 문이 열리자, 바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나도 에스컬레이터 방향 바로 앞에서 바로 내렸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 뒤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앞에 그녀가 서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실핏줄 하나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오돌오돌한 피부가 일어난 것까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눈 앞. 코 앞. (이 땐 절대 침을 흘리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됐다. 지하철에서 보았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예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일은 벌어졌다.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은 그녀는 펄럭이는 치마를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짧은 것을 하고는 이런 이런...난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서 그냥 그녀에게 뒀다. 음... 감상했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안 보려고 했다. 그러나 보였다.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당당히 보여주는 것인가. 펄럭이던 말던, 웬만큼 펄럭이면 가방 같은 거로 가리는 것이 관례인데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보여주려, 안보여 주려 했던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것 참. 망사였다. 흰색. 너무 적나라했다. 이렇게 많은 부분을 보게 된 것은 국민학교 아스케키 이후로 처음이다. 팬티선전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하다니.
그녀에게 따지고 싶었다.
"당신이 무신 진짜 팬티 선전 모델인줄 알아?? 앙? 깨끗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어? 아니면 뭐야!"
그 때 CF에 이런 카피를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가릴 것인가!'
예전에 어떤 여성에게서 망산 불편하단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왜 그 말이 그 순간에 또 떠올랐을까. 난 자조 섞인 마음과 반성의 기운을 갖고 계단을 올라 집으로 향했다. 세상엔 참 많은 종류의 인간들이 생존한다는 것을 느끼며 거리에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에 입을 맞춰 불렀다. 바람이 시원했다.
作 원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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