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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수필

그리움은 맥주로 안된다.-서울신문사 에세이 공모작(1998)

서울신문사 에세이 공모작 '그리움은 맥주로 안된다.' (1998)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연'이라는 말로 가장된 행위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내가 눈을 들어 맥줏집 간판을 보지 않았더라면, 우린 아마 지금까지 계속 그랬듯이 그렇게 시간 속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매일 보는 맥줏집 간판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그 날따라 다르게 내 눈에 들어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경품을 내걸고 손님을 마중 나온 듯한 인상의 간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많은 사람들 속을 조금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렇게 지나갔을 그 길을 그 날 내 눈은 그 간판으로 쏠려있었다. 그 덕에 난 오래 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놀랐다. 그런 곳에 그녀가 서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망설였다.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나를 바라 봐주기를 바랬을까.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목석이 되어 버렸다. 이내 용기를 내어,
"저기... 혹시, 강성현씨 아니십니까?"
많이 변한 모습도 있었으리라. 아닐지도 모른다는 마음도 있었을 테고.
"아...?"
'아'를 길게 소리 죽여 내뱉으며 내게 손을 뻗치는 그녀를 보고 난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내 웃음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이 되었을까.
"너... 창연이? 많이 변했네. 어떻게... 잘 지냈어?"
사실,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맞이하리라 곤 생각지 못했다. 원래 이별이라 함은 슬픔이란 명제가 있는 것이니까.
"그래... 나 창연이야. 넌 변한 게 없구나."
사실 내가 보기엔 나보단 그녀가 더 변해 있었다. 스무살적의 풋풋함을 간직하진 않았지만, 약간의 세상의 때와 예전의 그 모습을 섞어놓은 모습이 더 보기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린 어제 만나고 오늘 다시 만난 사이처럼 그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다른 이의 눈을 빌리자면, 아마도 경품행사에 참여하려고 들어가나? 라고 생각이 들었을 만큼 우린 아주 자연스러웠다. 지극히도 어색했는데 말이다.
우리가 들어간 시간은 사람들이 얼큰하게 취해있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까 눈에 들어왔던 그 경품의 시간은 이미 끝나 있었다. 난 그 경품이란 것이 아마 그녀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하는 우스갯소리를 했고, 그녀는 웃었다. 아직도 그 웃음의 향기는 남아있었다. 그녀의 그 웃음이 보고 싶고, 그녀의 그 웃음이 생각나 눈물을 흘렸던 날들은 왜 그 때 그 순간에 그리도 생각이 나던지...
우린 맥주 한잔에 그 간의 얘기를 담았고, 맥주 두잔에 조금은 진솔하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헤어진 이후, 놀랍게도 어느 남자와도 교제를 가지지 않았다고 고백을 했다. 난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이중성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왜 내가 그 말에 좋아했는지 알 것이다. '맥주는 거품이 있어야 제 맛이야' 라는 말을 곧잘 했던 난, 아마 그 날도 그 말을 했던 것 같다.
우린 대학교 1학년때 만났다.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참으로 통속적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듯한 말이지만, 실로 그러했다. 사랑이라 함이 그렇듯이 까만 도화지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오직 그녀만을 그려 넣으라는 신의 계시를 받은 듯 한 그 느낌. 그것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릿결과 갸름한 목선, 크지 않은 키를 한 그녀에게 난 처음에 아무말도 못하는 바보였다. 그러나, 사랑이란 용기일까. 그녀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오늘 몇 페이지부터 강의하죠?"
바보... 나중에 알았는데, 그녀는 그 때 내게 속으로 바보라고 했단다. 우린 그렇게 사랑을 시작했다.
설탕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사랑의 맹세를 했던 그 강촌에서의 약속. 비오는 골목길에서 싸우며 돌아서는 그녀에게 첫키스를 했던 기억. 오징어랑 쥐포를 두고 서로 뺏기지 않으려고 아옹다옹했던 그 경복궁의 경회루. 술에 만취해 새벽 4시에 부모님께 난 '성현을 사랑합니다' 라고 미친 듯이 내뱉고 전화를 끊어 한동안 외출이 금지되었었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우린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했다. 난 '왜 그 때 날 떠나갔니' 라는 말만 빼고 거의 모든 나의 삶의 얘길 다 했다.

그렇게 웃음이 자욱한 맥주 잔을 끝으로 그 집을 나오니, 이미 시간은 12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두 남녀. 내가 사는 곳에서 만났으니, 당연히 그녀는 친구를 만나러 여기까지 왔고, 이젠 집으로 가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이 머리 속에 자리를 잡을 무렵, 그녀는 상상외의 말로 날 놀라게 했다.
"나... 사실은 이 동네 살아."
"...??"
놀라는 내 눈이 더 우스웠던지, 말을 빠르게 이어나갔다.
"너랑 헤어진 이 후로 널 한번쯤 볼 수 있을까했었어... 이 동네에서 자취해. 여기 온 지는 한참 됐어."
"그럼, 연락이라도 하지. 바보같이."
난 '바보같이 왜 그랬어. 나도 얼마나 보고싶었는 줄 알아!' 라고 속에선 연신 외쳐대고 있었다.
"그냥. 오늘 이렇게 만났잖니. 어때? 아쉬운데, 우리 집에 가서 한잔 더 할까?"
그녀는 이미 취해 있었다. 예전부터 술이 약해 항상 나보다 술이 약한 여자는 너 하나야 라고 핀잔을 주곤 했던 나 였다. 예전보다는 나아진 편이지만, 그래도 그녀의 주량을 알기에 난 내심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헤어지기 싫은 마음이 더 했을까.
"그러자."

꼬불한 길을 두어 번 도니, 그녀의 지하 자취방이 나왔다. 자취방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지하 아니면 옥탑. 그녀는 아늑한 지하를 택했나 보다. 혼자 사는 자취방답지 않게 제대로 된 현관문이 있었다. 아파트 식의 문고리와 철제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자취방답지 않게 느껴졌다.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서며 처음으로 느낀 것은 혼자 사는 집치고는 넓다라는 것이었다. 방은 하나였지만 컸고, 제대로 된 화장실에 제대로 된 싱크대가 있었다.
신발을 벗고,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서며 든 첫느낌은 휑함. 왼쪽엔 자그마한 옷걸이가 작은 옷들을 겨우 받치고 있었고, 방을 들어서는 정면엔 넓은 창이 있었지만 바깥 세상과는 단절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창이었다. 약간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작은 거울에 상으로 대충 만든 듯한 화장대와 책상이 있었고, 발을 두어 걸음 내딛으며 본 오른쪽엔 이불이 쌓여져 있었다. 벽면엔 그림 두어 개가 걸려 있었다. 정말 그녀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내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항상 화려함을 좋아했고, 깨끗함을 좋아했던 그녀라고 생각이 드는 나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그런 느낌의 그녀 방이었다.
"나... 이렇게 살아."
"여기 살면 시가 절로 나오겠다."
그 말 이후로, 난 아무말도 못했다.
한가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화장대에 놓인 사진 한 장. 그녀와 내가 오징어와 쥐포를 들고 경복궁에서 찍은 사진을 그녀는 액자에 끼워 항상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난 한참을 그 사진에 넋이 빠져 있을 때 그녀는 나의 어깨를 치며,
"이 음악... 생각나지?"
George Winston 의 'Variations on The Canon By Pachelbel' 이었다.
"그래."
크리스마스 이브날 그녀에게 선물했던 그 음악이었다. 그 이후로 계속 들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를 했지만, 그런 그녀가 너무나 고마웠다.
왠지 그녀의 방안엔 슬픔이 가득 베어있는 듯 했다. 그 음악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느낌은 더해갔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세병의 맥주를 따며 내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맥주를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 난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창연아... 난 말야. 널 떠나고 싶어서 떠났던 게 아니야. 네가 군대에 입대하고, 나도 얼마나 슬픈 날들을 보냈는 줄 아니? 난 말야.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왜 편지 하나를 보내지 않았니? 난 수 없이 보내었는데."
"그래. 그랬지. 넌 그걸 정말 모르겠니? 눈으로 보질 못하는데, 글로서 만나면 무얼 하니. 무의미하다고 생각됐어. 사진? 그것으로도 안돼. 넌 내 눈에 들어와야 있어야 했어. 그래서, 연락을 할 수가 없었던 거야. 연락을 하면, 네 소식을 들을 테고... 힘든 너의 그 모습을 상상하려하면 난 아마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거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알잖아."
맥주의 거품이 사라지고, 두 어잔을 더 마셨다. 그녀의 방안은 세상에 우리만 남겨놓고 모두 떠난 듯이 그렇게 조용했다. 발자국 소리가 어느 정도에서 들리는 지조차 분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방안은 흐르는 눈물소리도 날 것 같이 조용했다.
"난 말야. 네가 떠난 그 시간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 그리고, 나 혼자의 훈련을 했어. 너 없이 살아가는 훈련을 말이지. 네가 없어도 난 외로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 그걸 터득하려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니? ... "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굵은 눈물 방울이 맥주잔 속으로 그렇게 흘러 들어갔다.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입을 다시 열었다.
"그 훈련이 뭔지 알아? 항상 네가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 였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쉽지 않더라. 처음엔 미칠 듯이 보고싶어서, 하루 종일 울어버린 적도 있어."
'울어버린...' 이란 말을 할 때, 그녀는 손을 눈가에 가져갔다.
"그래서, 널 곁에 두려고 사진을 액자에 끼워 넣었어. 그리고, 네 향기를 잊지 않으려고 네가 즐겨 쓰던 향수를 샀어. 항상 방안에 뿌렸지. 너 그거 알았니? 후후... 난 그랬어. 넌 연락 안한다고 화를 냈을 때에 난 너의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는지도 몰라. 네가 보고싶으면 너와 갔던 그 곳들을 하루에 한 곳씩 갔어. 그리고, 너와 했던 말들을 같은 억양으로 내뱉어도 봤고. 널 사랑한다고 북한산 꼭대기에서 미친 듯이 외쳤을 땐, 정말이지... 눈물이 나오더라. 내가 널 버렸다고 했었지? 잠깐 집안이 어려웠던 적이 있었어. 그 때문에 집을 나와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없었어. 하지만, 네가 사는 이 곳에 오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져... 그래서, 이리로 아예 이사를 오게 된 거지. 난 널 버리지 않았어. 언젠가 널 만나면 주려고 매일 쓴게 있다.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믿고서 말이지."
화장대 서랍에서 꺼낸 공책은 한 권이 아니었다. 한장한장을 열며 볼 때마다 빼곡이 들어찬 나에 대한 내용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나와서 차마 더 볼 수가 없었다.
"창연아. 방이 좀 어수선하지?"
"아니..."
"아니긴, 네가 생각하는 대로의 방이 아니란 걸 알아."
"그래... 조금은."
"왜 이렇게 해 놨을까?"
"..."
"넌 화려한 것도, 아주 깨끗한 것도 싫어했잖아. 내가 이렇게 한 이유가 있어. 네가 이제 이 빈 공간들을 채워 넣어줬으면 싶어. 그래서 남겨 놓았던 거야."
놀랐다.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며 오늘의 행운쯤으로 생각을 하려했던 나의 생각은 또 한번 틀리고 말았다. 그 때 그렇게 헤어지게 된 것이 그녀의 잘못이라며 치부해 버리려던 그 잘못된 생각을 난 오늘도 하고 있었는데...
그랬다. 그녀는 그 수많은 시간을 고독과 함께 지내왔는지도 모른다. 항상 냉장고에 맥주를 가득 넣어 놓고, 맥주로 하루를 달래며 나를 생각하고 지낸 날들이 눈앞에 선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고독이란 것과 싸웠고, 난 세상과 싸우며 살았다. 끝나지 않은 사랑은 언젠가는 다시 이어지리라는 믿음으로 그녀는 고독을 견딜 수 있었고, 이미 끝나버린 사랑은 잊고 다른 사랑으로 이어지리라는 마음으로 살아오며 견딘 나의 고독. 그 단어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창연아... 사랑은 끝나지 않았어...' 라고 중얼거리며 누워 잠이 든 그녀를 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얇은 이불 한 장으로 겨울을 지내야 하는 그녀를 위해 넓고 두꺼운 이불하나를 마련해 주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그녀의 집을 나섰다. 그녀의 집을 나서 길을 걸으며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는데, 왜 그리 담배 연기가 하얗게 보이던지... 오늘부터는 밤에 맥주가 없어도 잠이 쉬이 들것이라는 예감이 들며,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맥주깡통을 발로 차며 길게 숨을 몰아 쉬었다.


作 원창연
원고지 30장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