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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수필

인연과 추억. 1998.

인연과 추억. 1998.
 
 
지하철안의 따뜻한 온기에 취해 잠이 절로 들었던 어느 나른한 오후였다.
한마디 쨍한 목소리에 안의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그리로 모아졌다. 앨범을 손에 든 그 아저씨의 그럴듯한 음성이 내 귓가에도 다가와 시선을 이끌었고, 천원에 120장이 들어간다라는 말에 혹해 그 앨범을 세개나 손에 쥐었다.
제대하기 전부터해서 많은 사진들이 상자속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넘쳐나는 앞으로의 사진들도 염려되어 그것을 쉽게 손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그것들을 정리하며 사진들을 손에 쥐고 버릴것들, 간직할 만한 것들을 의식적으로 나누었다.
버려야 하나... 간직해야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환하게들 웃고 있는 그네들을 보며, 그리 쉽게 한귀퉁이로 밀어 놓지는 못했다.
그래도 한때는 사랑이라는 이름에 목이 메이도록 닳디 닳은 사진들이건만은.

추억...

그 이름 하나로도 우린 많이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기억이 시작되는 유년시절부터 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일거리들이 지나고나면 추억이란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되어 훗날 아련하게 우리들 맘속을 데워 줄 것이다.
유년시절 동네 아이들과 딱지 싸움으로 시작해서 코피터지는 싸움까지.
소년시절 짝꿍의 책상을 금으로 그어 넘어오지 말라는 -정말 유치한 일이었지마는- 경고로 시비를 걸었던 기억... 도시락에 온갖 반찬들을 섞어 흔들어 대며 내가 더 맛있는 비빔밥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기억... 소풍이라도 갈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른 흉내를 내기에 급급했던 친구들의 기억... 서로 어른들의 흉내를 내면 학우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기에 우린 서로가 더 하려고 애를 썼었던 그런 기억들... 성년이 되어 사랑에 대한 기억까지 우린 정말 많은 추억거릴 담아내며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런 기억들이 사진에 담겨 한마디의 소리도 없이 우릴 보고 항상 웃고 있듯이, 우리도 그것을 볼 때면 웃음을 짓는다.

몇해전에 '은행나무의 침대'라는 영화가 있었다.
오래간만에 한국영화의 위상을 세워졌다라는 평과 함께 흥행에도 성공을 거뒀던 영화였다.
천년... 전생이라는 신드롬을 만들어 낼 정도로 사람들에게 많은 전생에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던 그런 영화였다. 양귀자 소설 '천년의 사랑' 또한 한 몫을 했겠지만,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가 더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리라.
천년전에 궁중악사였던 한 남자와 공주였던 여인과의 사랑이 현실에까지 이어져 결국엔 1분간의 사랑이 허락되지만, 그 마음만은 영원할 것이라는... 내용은 그러하지만 분위기상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던 영화였다.
요즘엔 '접속' 신드롬이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PC통신이 인기라는 얘기가 있다.
대종상 작품상까지 거머쥐을 정도로 그 영화는 사람들에게 또 다시 인연이란 공통된 소재를 맘속에 새겨주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간의 얼굴도 모르는 호감이 결국엔 사랑으로 이어진다라는 내용이다.
어찌보면, 진부한 내용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호기심과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은 인연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라는 것이겠다.

일상생활을 산뜻한 영상으로 처리한 것도 흥행의 요소가 되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만나 결국엔 사랑까지 한다라는 내용 또한 그러한 인연이란 말에서 연유될 것이다.
불교엔 이런 말이 있다.
전생에 일만겁의 인연이 있어야 같은 땅위에 태어나고, 천만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을 한번 스친다고 했다.
군에서의 만남은 악연이라지만, 그런 만남까지도 우린 추억하면 웃게 되버리는 것을... 악연이라며 치부해 버렸던 실수를 아마도 해가 바뀌고 바뀌어 늙고 지쳐갈 땐 나 자신도 모르는 흐뭇함이 있을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나고 죽으면서 과연 몇명이나 얼굴을 대하고 그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며 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 사람들에게 기억되는지.

인연...

가을이 간다.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많이 춥다라고 했다.
겨울향기가 곧 다가 오겠지만, 아련한 첫눈에의 사랑같은 인연으로 추억을 되새기기엔 내가 너무 젊음을 느낀다.
젊음, 패기, 용기, 노력 등등으로도 모자라 많은 수식어들이 붙어다님은 그 만큼 앞으로 많은 인연들이 기다리고, 많은 추억들이 기다린다라는 뜻 일테다.

짧다면 짧은 2년여의 학창 생활동안 나 또한 많은 인연들에 지어진 추억들을 만들었다.
젊음에의 2년은 노년에의 20년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것도-내가 군대에서 항상 외치던 한마디였다- 그 만큼 젊었을 때의 만남은 중요하고, 기회가 많이 있다라는 뜻일 것이다.
이제서야 생각해보면 대학생활이라는 이름하에 해보지 못한 것들도 너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사회라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보면 또한 많은 인연들이 손짓을 한테고, 손을 들어 '나요'하면 손을 내리는 이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도 추억이 된다라고 생각하면 그리 얼굴 붉힐 일은 없다라고 생각된다.

인연으로의 추억.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평생 가지고 다녀야 할 보석상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눈 감는 그 날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