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재혁은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 앉아 다른 사람들들과 하나가 되었다. 어딘가에서 큰 소리가 나면 모두 눈을 돌린다. 왼쪽, 오른쪽으로 연신 돌아가는 눈동자들은 다름아닌 배드민턴 라켓을 들은 -부부로 보이는- 남녀였다.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라이터를 두어번 움직여 켜면서 보상보험금에 가입 되어 있다는 글을 본다.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시계를 본다. 5시가 넘었다. 아직도 2시간이 남은 약속 시간이다. 무엇을 해야 하나. 이리도 할 일이 없나. 재혁은 시계만 만지작 거리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작은 소리로 부른다.
"너... 재혁이 아니니?"
놀라는 재혁의 뒤엔 한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한 명 서 있다.
"...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한다. 단번에 알아보는 건 무리다.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데, 난 그를 모른다. 기억을 더듬어 그를 알아보는 데는 적어도 약 3-4초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 이상이 되면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도 좋다.
"재혁이 맞지? 나야 나. 우리 어렸을 적에 같은 반 이었잖아. 모르겠어? 기억이 안나나 보네."
"아... 너... 은경이?"
정확하게 5초 정도 였을 것이다. 4초 보다는 늦었지만, 하여튼 기억을 해 냈다. 화장은 고사하고 코흘리개 어린 시절에 만나서 헤어진 사람을 알아보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재혁은 그저 나른한 오후에 자신을 아는 척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그저 아는 척만 하자 라는 식으로 말하려 했는데, 코밑에 있는 점을 보고 은경이임을 알아차렸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게 얼마만이니? 은경이 넌, 여기 왠일이야. 근데?"
"그래. 정말 오랜만이네. 국민학교 졸업하고 처음이니까. 10년도 훨씬 넘었다. 그치? 아. 여긴 친구만나러 나왔다가, 아직 나오질 않네. 저기 보이지?"
은경이 손을 쭉 내밀어 보이는 곳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벤치 한가운데 였다.
"저기 앉아 있다가, 널 봤지. 처음엔 설마 했는데... 그래도, 한번 물어나 보자 하구 왔지."
손을 내미는 데 팔이 길어보였다. 처음엔 알지 못했는데, 재혁이 일어서며 보니 키도 컸다. 예전의 기억은 어느새 하나 둘씩 사라지고, 오늘 만난 이은경이란 인물만이 재혁의 기억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구나. 나두 친구 만나러 나왔다가... 사람들이 많네. 토요일이라서 그런가봐. 근데, 너 많이 이뻐 졌구나? "
많이도 어색할 상황인데도 재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은경도 어제보고 오늘 보는 사람처럼 재혁을 대했다. 재혁과 은경은 국민학교 4학년때 같은 반을 지내면서 서로 좋아했던 기억을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올리고 있을까?
"몇시에 만나기로 했니? 친구는? 시간 남으면 우리 차 한잔 하자."
"그러지 말구. 더운데 맥주나 한잔 하자."
"그럴까? 그럼?"
재혁과 은경을 멀리서 다른 이가 본다면, 애인을 기다리던 남자가 애인이 오니까 사랑스런 눈빛으로 그 애인을 맞이하고 그 애인도 그 남자에게 안기어 어디론가 가는 듯이 볼 것이다. 재혁과 은경의 키는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것이 재혁을 흐뭇하게 했다. 둘은 걸으며 술집에 들어서기 전까지 비교적 얘길 많이 했다.
재혁과 은경이 들어선 곳은 시끄러운 곳이었다. 병맥주만을 전문으로 파는 듯 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의 전부가 약속이나 한 듯이 컵도 없이 병을 손에 쥐고 웃고 떠들어 댔기 때문에 재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 앉자."
먼저 이 가게에 들어선 것도 은경이고, 자리를 잡은 것도 은경이었다. 은경은 재혁을 리드하는 듯 했다.
"야... 시원하다. 여기 좋지? 내가 자주 오는 곳이야. 근데. 이게 얼마만이니? 이상하게 어색하질 않다. 그치?
"그래. 처음보는 사람처럼 느껴지진 않네. 너 화장두 하구 그러니까 몰라보겠더라. 키두 많이 컸네."
컸네... 라는 말을 하며 재혁은 은경의 아래쪽을 보는 척 했다. 그리 진하지 않은 화장이 오히려 더 이뻐 보였다. 붉은 빛으로 눈과 입술을 매치시킨 은경을 보며 감각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옷은 검은 색으로 통일을 시켰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핸드백은 블루 계열이었다. 그러나, 무척이나 어두운 블루 계열이었다. 재혁은 오늘 하루 종일 따라다닌 세가지 색을 은경에서도 발견하고 있었다.
"난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어. 휴학을 하고 있다가 이번에 등록을 하려고 해. 재혁이 넌 좋은 학교에 다닌다는 얘긴 들었는데, 졸업을... 했겠다?"
"응. 졸업은 했어."
은경이도 눈치가 빠른지 그 다음으로 당연히 이어질 '취직은?'이란 질문은 하지 않고 마침 테이블로 다가온 종업원에게 맥주 두병이란 말로 재혁을 무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덥지? 날씨가 6월부터 이러면 여름엔 어떨까 몰라. 정말 걱정이다."
웃옷을 벗는 은경을 보고 재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은경은 가슴이 패이고 팔을 훤히 드러낸 나시티를 웃옷 속에 입고 있었다. 재혁은 은경의 살이 희다라는 것과 머리가 유난히 까맣다라는 것이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엔 별로 할 말이 없다. 소식을 전하며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면 괜찮을 터인데, 둘 사이엔 공통된 관심사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국민학교 동창이라는 같은 맥이 있었기 때문에 둘은 그것으로 대화를 풀어나갔다.
"재혁이 넌 연락하는 애 있니? 다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네."
"아니. 없어. 졸업하면 원래 그렇잖니. 연락해라. 보고 싶을거야. 그러면서도 하나도 연락을 하지 않지."
"맞아."
"누가 결혼하긴 한다고 하더만.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튼, 나이두 차구 너두 결혼 안하냐? 애인없어?"
"후훗. 애인? 그런 거 안키운다. 난."
그 말이 무척이나 당당하게 들렸다.
"그러는 넌? 애인 없냐? 혹시 오늘 애인 만나기로 한 거 아냐?"
"아냐."
"애인을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구. 혼자가 편하다."
"그래."
은경의 물음에 그저 대답만 할 뿐이었다. 재혁은 예전에 은경의 집앞에서 물세례를 받았던 얘길 꺼냈다. 은경은 웃고, 그 것을 어떻게 다 기억하냐고 하며 놀라기 까지 했다. 재혁은 은경을 좋아했었다고 말했다. 그런 재혁을 보고 은경은 놀라지 않으며,
"정말?"
입이 함박만 해져서 재혁을 보고 깔깔대며 웃는다.
"그래. 아마 첫사랑일 걸? 하하."
"근데, 왜 말을 안했어? 바보처럼. 좋아했다면 말을 했어야지."
바보. 수 없이 들었던 말. 수 없이 되내이던 말. 그 말을 은경에게서 오늘 또 다시 듣고 있다.
"그냥. 말하기가 어디 쉽냐. 너라면 하겠니?"
"그런데, 너 아직두 이 동네 사는 모양이구나? 이 곳에 온 걸 보니."
"응. 그러는 넌?"
"난 이사갔어. 고등학교 때 강남으로 이사했지. 근데, 내신등급이 더 떨어지는 것도 모르구 괜히 갔지 싶어. 지금 생각하면. 그래두,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갔으니 다행이지 뭐니."
재혁은 아직두... 라는 말을 듣고 조금 멈칫했다. 은경이 강남으로 이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학이 뭐가 중요하다구.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냐."
"그래? 그럼 뭐가 중요한데?"
재혁은 말문이 막혔다. 뭐가 중요할 까. 정말 뭐가 중요한 것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그것을 깨닫기란 얼마나 힘든가. 중요함과 중요하지 않음의 차이를 느낀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지만 갑작스런 질문에 입을 다물고 마는 재혁이었다.
창밖을 보며 시원히 웃는 은경의 모습이 왠지 좋아보였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내가 올 곳이 아닌 곳을 제 집을 드나들 듯이 드나들고, 내가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그녀를 보며 재혁은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기지배가 전활 안하네. 약속이 쫑나면 났다고 얘기나 할 것이지."
물론, 혼잣말이었다. 그것에 대꾸하면 혼잣말이 아니고, 그것에 대꾸하지 않으면 혼잣말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이치는 이리도 단순했다. 그리도 단순한 인생이건만.
"맥주 더할까? 어디 가서? 근데, 너 약속 시간 괜찮니?"
"그래..."
재혁은 대답을 해 놓고 생각한다. 지금 7시는 아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한 것은 그녀와 그 가게문을 나서며 였다.
...8편에 계속
재혁은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 앉아 다른 사람들들과 하나가 되었다. 어딘가에서 큰 소리가 나면 모두 눈을 돌린다. 왼쪽, 오른쪽으로 연신 돌아가는 눈동자들은 다름아닌 배드민턴 라켓을 들은 -부부로 보이는- 남녀였다.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라이터를 두어번 움직여 켜면서 보상보험금에 가입 되어 있다는 글을 본다.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시계를 본다. 5시가 넘었다. 아직도 2시간이 남은 약속 시간이다. 무엇을 해야 하나. 이리도 할 일이 없나. 재혁은 시계만 만지작 거리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작은 소리로 부른다.
"너... 재혁이 아니니?"
놀라는 재혁의 뒤엔 한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한 명 서 있다.
"...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한다. 단번에 알아보는 건 무리다.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데, 난 그를 모른다. 기억을 더듬어 그를 알아보는 데는 적어도 약 3-4초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 이상이 되면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도 좋다.
"재혁이 맞지? 나야 나. 우리 어렸을 적에 같은 반 이었잖아. 모르겠어? 기억이 안나나 보네."
"아... 너... 은경이?"
정확하게 5초 정도 였을 것이다. 4초 보다는 늦었지만, 하여튼 기억을 해 냈다. 화장은 고사하고 코흘리개 어린 시절에 만나서 헤어진 사람을 알아보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재혁은 그저 나른한 오후에 자신을 아는 척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그저 아는 척만 하자 라는 식으로 말하려 했는데, 코밑에 있는 점을 보고 은경이임을 알아차렸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게 얼마만이니? 은경이 넌, 여기 왠일이야. 근데?"
"그래. 정말 오랜만이네. 국민학교 졸업하고 처음이니까. 10년도 훨씬 넘었다. 그치? 아. 여긴 친구만나러 나왔다가, 아직 나오질 않네. 저기 보이지?"
은경이 손을 쭉 내밀어 보이는 곳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벤치 한가운데 였다.
"저기 앉아 있다가, 널 봤지. 처음엔 설마 했는데... 그래도, 한번 물어나 보자 하구 왔지."
손을 내미는 데 팔이 길어보였다. 처음엔 알지 못했는데, 재혁이 일어서며 보니 키도 컸다. 예전의 기억은 어느새 하나 둘씩 사라지고, 오늘 만난 이은경이란 인물만이 재혁의 기억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구나. 나두 친구 만나러 나왔다가... 사람들이 많네. 토요일이라서 그런가봐. 근데, 너 많이 이뻐 졌구나? "
많이도 어색할 상황인데도 재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은경도 어제보고 오늘 보는 사람처럼 재혁을 대했다. 재혁과 은경은 국민학교 4학년때 같은 반을 지내면서 서로 좋아했던 기억을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올리고 있을까?
"몇시에 만나기로 했니? 친구는? 시간 남으면 우리 차 한잔 하자."
"그러지 말구. 더운데 맥주나 한잔 하자."
"그럴까? 그럼?"
재혁과 은경을 멀리서 다른 이가 본다면, 애인을 기다리던 남자가 애인이 오니까 사랑스런 눈빛으로 그 애인을 맞이하고 그 애인도 그 남자에게 안기어 어디론가 가는 듯이 볼 것이다. 재혁과 은경의 키는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것이 재혁을 흐뭇하게 했다. 둘은 걸으며 술집에 들어서기 전까지 비교적 얘길 많이 했다.
재혁과 은경이 들어선 곳은 시끄러운 곳이었다. 병맥주만을 전문으로 파는 듯 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의 전부가 약속이나 한 듯이 컵도 없이 병을 손에 쥐고 웃고 떠들어 댔기 때문에 재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 앉자."
먼저 이 가게에 들어선 것도 은경이고, 자리를 잡은 것도 은경이었다. 은경은 재혁을 리드하는 듯 했다.
"야... 시원하다. 여기 좋지? 내가 자주 오는 곳이야. 근데. 이게 얼마만이니? 이상하게 어색하질 않다. 그치?
"그래. 처음보는 사람처럼 느껴지진 않네. 너 화장두 하구 그러니까 몰라보겠더라. 키두 많이 컸네."
컸네... 라는 말을 하며 재혁은 은경의 아래쪽을 보는 척 했다. 그리 진하지 않은 화장이 오히려 더 이뻐 보였다. 붉은 빛으로 눈과 입술을 매치시킨 은경을 보며 감각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옷은 검은 색으로 통일을 시켰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핸드백은 블루 계열이었다. 그러나, 무척이나 어두운 블루 계열이었다. 재혁은 오늘 하루 종일 따라다닌 세가지 색을 은경에서도 발견하고 있었다.
"난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어. 휴학을 하고 있다가 이번에 등록을 하려고 해. 재혁이 넌 좋은 학교에 다닌다는 얘긴 들었는데, 졸업을... 했겠다?"
"응. 졸업은 했어."
은경이도 눈치가 빠른지 그 다음으로 당연히 이어질 '취직은?'이란 질문은 하지 않고 마침 테이블로 다가온 종업원에게 맥주 두병이란 말로 재혁을 무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덥지? 날씨가 6월부터 이러면 여름엔 어떨까 몰라. 정말 걱정이다."
웃옷을 벗는 은경을 보고 재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은경은 가슴이 패이고 팔을 훤히 드러낸 나시티를 웃옷 속에 입고 있었다. 재혁은 은경의 살이 희다라는 것과 머리가 유난히 까맣다라는 것이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엔 별로 할 말이 없다. 소식을 전하며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면 괜찮을 터인데, 둘 사이엔 공통된 관심사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국민학교 동창이라는 같은 맥이 있었기 때문에 둘은 그것으로 대화를 풀어나갔다.
"재혁이 넌 연락하는 애 있니? 다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네."
"아니. 없어. 졸업하면 원래 그렇잖니. 연락해라. 보고 싶을거야. 그러면서도 하나도 연락을 하지 않지."
"맞아."
"누가 결혼하긴 한다고 하더만.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튼, 나이두 차구 너두 결혼 안하냐? 애인없어?"
"후훗. 애인? 그런 거 안키운다. 난."
그 말이 무척이나 당당하게 들렸다.
"그러는 넌? 애인 없냐? 혹시 오늘 애인 만나기로 한 거 아냐?"
"아냐."
"애인을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구. 혼자가 편하다."
"그래."
은경의 물음에 그저 대답만 할 뿐이었다. 재혁은 예전에 은경의 집앞에서 물세례를 받았던 얘길 꺼냈다. 은경은 웃고, 그 것을 어떻게 다 기억하냐고 하며 놀라기 까지 했다. 재혁은 은경을 좋아했었다고 말했다. 그런 재혁을 보고 은경은 놀라지 않으며,
"정말?"
입이 함박만 해져서 재혁을 보고 깔깔대며 웃는다.
"그래. 아마 첫사랑일 걸? 하하."
"근데, 왜 말을 안했어? 바보처럼. 좋아했다면 말을 했어야지."
바보. 수 없이 들었던 말. 수 없이 되내이던 말. 그 말을 은경에게서 오늘 또 다시 듣고 있다.
"그냥. 말하기가 어디 쉽냐. 너라면 하겠니?"
"그런데, 너 아직두 이 동네 사는 모양이구나? 이 곳에 온 걸 보니."
"응. 그러는 넌?"
"난 이사갔어. 고등학교 때 강남으로 이사했지. 근데, 내신등급이 더 떨어지는 것도 모르구 괜히 갔지 싶어. 지금 생각하면. 그래두,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갔으니 다행이지 뭐니."
재혁은 아직두... 라는 말을 듣고 조금 멈칫했다. 은경이 강남으로 이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학이 뭐가 중요하다구.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냐."
"그래? 그럼 뭐가 중요한데?"
재혁은 말문이 막혔다. 뭐가 중요할 까. 정말 뭐가 중요한 것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그것을 깨닫기란 얼마나 힘든가. 중요함과 중요하지 않음의 차이를 느낀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지만 갑작스런 질문에 입을 다물고 마는 재혁이었다.
창밖을 보며 시원히 웃는 은경의 모습이 왠지 좋아보였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내가 올 곳이 아닌 곳을 제 집을 드나들 듯이 드나들고, 내가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그녀를 보며 재혁은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기지배가 전활 안하네. 약속이 쫑나면 났다고 얘기나 할 것이지."
물론, 혼잣말이었다. 그것에 대꾸하면 혼잣말이 아니고, 그것에 대꾸하지 않으면 혼잣말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이치는 이리도 단순했다. 그리도 단순한 인생이건만.
"맥주 더할까? 어디 가서? 근데, 너 약속 시간 괜찮니?"
"그래..."
재혁은 대답을 해 놓고 생각한다. 지금 7시는 아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한 것은 그녀와 그 가게문을 나서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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