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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소설

권태5

5

재혁은 담배를 빨며 자신의 손목을 힐끗 본다. 후후. 이렇게 죽을 것을. 무엇 때문에 살아있는가. 사람, 삶, 사랑. 세 단어에 항상 치여 사는 내 자신이 싫다. 재혁은 잠시 되내이며 서울역으로 들어간다. 바쁜 사람들.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 자신의 목적지를 연신 외쳐대며 역원과 신랑이를 하는 사람. 매점에서 우동국물을 후르룩 들이키는 사람. 멀쩡하게 차려입은 신사복에 실내인데도 짙은 선그라스를 낀 다소 부자연스러운 태도의 남성.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TV는 연신 무어라 떠들어대고. 재혁은 자신의 심정과 TV의 심정이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에 자리를 잡고 두어번 의자를 털며 앉는다.
"어디 출신이야?"
초면에 반말 짓거리다. 눈을 보니 그리 심성나쁜 사람 같진 않다. 내 옷차림이 그리도 허름한가? 홈리스족? 그것으로 보는가? 자리에 앉자마자 사내의 물음은 그렇게 이어졌다.
"난 집이 분당이유. 45평 아파트에 버젓이 잘도 살았지. 자식새끼 둘에 마누라두. 근데 말야."
근데... 라고 말을 할 때 재혁은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려 했다. 사내의 급한 심정때문이었을까. 그 사내는 묻지 않아도 자신의 지난 과오를 컴퓨터 프린터기로 자료를 뽑듯이 그렇게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 대기업을 하청업체 사장이었다우. 제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대학 동창녀석들 중에 내가 제일 잘 나갔으니까. 어느 정돈지 아시겠지?"
갑자기 존대. 왠지 내가 일어서려는 폼에 불안했던 것일까. 반말보단 듣기 좋았다.
"내가 거느리고 있던 직원이... 음...그러니까... 200명이 넘었지? 아마? 근데, 망할놈의 이 나라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집? 집도 들어가지 않아. 가면 뭣하나. 빛쟁이들 태산인데. 가지 않아. 가고 싶지도 않고. 이게 편해. 밥? 그건 걱정말아. 종로에 가면 점심은 그럭저럭 때울 수 있구. 어떤 날은 구걸하면 그런대로 하루는 버티지. 요즘은 자네처럼 멀쩡한 옷차림을 하고 여기서 잠을 자는 일이 많다네. 그러니까... 참. 나이는 어떻게...?"
듣기도 싫은 그 얘기. 재혁은 '어디 출신이야?' 할 때 일어서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한다. 거의 1년여를 TV만 켜면 들었던 얘기. 신문만 펼치면 내 눈을 여지없이 바라보던 글들. 듣기 싫다. 재혁이 일어서려는 차에 그 사내는 이렇게 말한다.
"집이 있는 모양이군. 나이는 그럭저럭 되어 보이는데... 왜 이시간에 여기와 있나? 젊으면 일을해! 일을! 놀지 말고! 나도 내가 자네 나이때 이렇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었으니까."
재혁은 살며시 웃으며 눈인사를 한다. 건강하시라고. 밥 굶지 마시길 바란다고. 그리고, 이 말도 해주고 싶었다. 현실도피하지 말라고.
시계를 본다. 4시 44분. 불길한 숫자의 연속이다. 이런 경우엔 달리 방법이 없다. 눈을 재빨리 돌리는 수 밖엔. 3시 33분. 5시 55분. 재혁이 좋아하는 숫자의 연속인 시간을 보면 기분이 왠지 좋아지고, 불길한 숫자의 연속을 보면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지극히도 단순한 인간. 재혁은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며 지하철 계단을 내려간다. 지갑속에 정액권을 꺼내어 넣는다. '삐...' 소리가 난다. 왜지? 아무 이상 없을텐데? 다른 곳으로 간다. 삐... 다가오는 역원.
"음... 잠시만 이쪽으로 오실래요? 확인 좀 하구요."
2분쯤 흘렀을까. 아무 이상 없으니 다시 한번 해 보라는 역원의 말을 눈으로 받는다. 이상없다. 계단을 내려오기까지 그 역원을 연신 뒤돌아보며 걷는 재혁. 그 역원도 재혁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
덥다. 지하철역안의 환기는 제대로 되는지, 안되는지 그런건 파악하지 않고 누가 무임승차할 까해서 개찰구만 지키는 인간들이라니. 땀이 등줄기를 탄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더운 바람을 이끌고 달려오는 전철. 그 안은 제법 시원했다. 몇 정거장을 더 가야하나.
지하철이 혜화역에 도달했을 때, 재혁은 배를 다시 한번 움켜쥔다. 아까 먹은게 잘목됐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선. 먹은 건 그것뿐이니까. 재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나선다. 계단. 왜이리 계단이 많은가. 땅이 넓지 않으니 위아래로 올리고 내리는 수밖에. 그럴 수 밖에 없으니 이렇게 계단이 많지. 힘이 든다. 밖으로 나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빨강. 그것도 아주 샛빨강이다. 손으로 가방을 더듬으며 지퍼를 당긴다. 선그라스. 눈은 이내 파랑과 검은 색의 알맞게 조화로운 빛을 본다. 여기도 사람이 많군.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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