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7시. 오후 7시 였다.
"야. 미안하다. 내가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다음에 사주라."
재혁은 7시지만, 친구와 같이 있지 않고 은경과 같이 있었다. 이렇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인생은 어짜피 아는 길로 가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재혁은 스스로를 그렇게 수긍하며 술이 얼큰하게 된 은경일 걱정했다.
"벌써 이러면 어떻하냐. 괜찮어?"
"괜찮어... 재혁아."
"왜. 말해."
"나 사실은 힘들어.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 바엔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당당하고 기운 넘쳐 보이던 그 모습은 없었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남자의 어깨를 필요로 하고, 남자의 굵은 팔로 부축을 해줘야만 일어설 수 있는 한없이 가녀린 여인이었다.
"뭔 술을 같이 마시고 너만 취하냐. 말해 봐. 오랜 만에 만나서 기분이 너무 좋다. 난. 옛날 생각도 오랜만에 할 수 있고."
재혁이 친구와 약속을 깬 데에는 이런 은경을 두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경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시계를 봤다. 8시 20분. 20시 20분이라.
"너 집이 어디니? 가자. 집에."
"음... 아냐. 더 먹자. 괜찮아. 이제 시작인데. 나 술 잘먹어..."
"아냐. 안돼."
은경을 부축하고 일어서며 재혁은 빨간 색을 보았다. 테이블로 떨어지며 맑고 투명한 소주잔에 떨어져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은경을 내려놓고 손을 코에 가져다 대니 빨간 것이 한움쿰이나 묻혀진다. 고개를 뒤로 쳐들고 휴지를 갔다대니, 하얀 휴지가 빨갛게 물든다.
"야... 너 코피나잖아. 이리 와바."
은경의 손에까지 묻었다. 이런 경우엔 가만히 있어야 하나. 재혁은 생각하며 가만히 있는다. 피가 멈춘 것을 확인하고는 일어서며,
"너 요즘 피곤한가봐? 코피가 다 나구. 너 예전에두 피곤하면 자주 흘렸잖아."
이런 느낌. 참으로 오랜만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따뜻한 손을 가져다 대 주는 것. 재혁은 일어서며 막힌 코로 은경의 까만 머리결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좋았다. 사과향 같았다. 빨갛게 익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나는 그 향기. 그 내음. 그것 같았다.
...9편에 계속
7시. 오후 7시 였다.
"야. 미안하다. 내가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다음에 사주라."
재혁은 7시지만, 친구와 같이 있지 않고 은경과 같이 있었다. 이렇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인생은 어짜피 아는 길로 가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재혁은 스스로를 그렇게 수긍하며 술이 얼큰하게 된 은경일 걱정했다.
"벌써 이러면 어떻하냐. 괜찮어?"
"괜찮어... 재혁아."
"왜. 말해."
"나 사실은 힘들어.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 바엔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당당하고 기운 넘쳐 보이던 그 모습은 없었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남자의 어깨를 필요로 하고, 남자의 굵은 팔로 부축을 해줘야만 일어설 수 있는 한없이 가녀린 여인이었다.
"뭔 술을 같이 마시고 너만 취하냐. 말해 봐. 오랜 만에 만나서 기분이 너무 좋다. 난. 옛날 생각도 오랜만에 할 수 있고."
재혁이 친구와 약속을 깬 데에는 이런 은경을 두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경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시계를 봤다. 8시 20분. 20시 20분이라.
"너 집이 어디니? 가자. 집에."
"음... 아냐. 더 먹자. 괜찮아. 이제 시작인데. 나 술 잘먹어..."
"아냐. 안돼."
은경을 부축하고 일어서며 재혁은 빨간 색을 보았다. 테이블로 떨어지며 맑고 투명한 소주잔에 떨어져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은경을 내려놓고 손을 코에 가져다 대니 빨간 것이 한움쿰이나 묻혀진다. 고개를 뒤로 쳐들고 휴지를 갔다대니, 하얀 휴지가 빨갛게 물든다.
"야... 너 코피나잖아. 이리 와바."
은경의 손에까지 묻었다. 이런 경우엔 가만히 있어야 하나. 재혁은 생각하며 가만히 있는다. 피가 멈춘 것을 확인하고는 일어서며,
"너 요즘 피곤한가봐? 코피가 다 나구. 너 예전에두 피곤하면 자주 흘렸잖아."
이런 느낌. 참으로 오랜만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따뜻한 손을 가져다 대 주는 것. 재혁은 일어서며 막힌 코로 은경의 까만 머리결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좋았다. 사과향 같았다. 빨갛게 익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나는 그 향기. 그 내음. 그것 같았다.
...9편에 계속
'Sensibility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소설] 노란튤립 - 2002 (0) | 2009.07.01 |
---|---|
권태9 (0) | 2009.07.01 |
권태7 (0) | 2009.07.01 |
권태6 (0) | 2009.07.01 |
권태5 (0) | 2009.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