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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소설

권태9

9

은경의 집은 강남이 아니었다. 택시를 타고 몇분 가지 않아 골목길이 나왔고, 은경의 자취장까지 이어지는 길은 거의 오르막길 이었다. 은경을 한 손으로 부축하고 걸어가는 그 길엔 유난히도 가로등이 많았다. 어두운 밤길을 홀로 서서 밝혀주는 그 빛에 물들어 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외롭진 않을 것 같았다.
"여기야. 다 왔어. 고마워. 데려다 줘서. 들어와서 차나 한잔 하구 가라."
"아냐. 늦었어. 가봐야지."
"그러지 말구. 들어왔다가. 택시비 줄게."
왜 돌아서서 가지 못했을까. 자취방 문을 들어서며도 그 생각을 하다가 재혁은 그 생각을 멈추게 해 주는 무엇하나를 보았다.
"이게 뭐니?"
"뭐긴 뭐니. 사진이지."
"아니. 이거 옛날에..."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맞다. 재혁은 은경과 둘이 소풍가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 사진은 한 장 뿐이었다는 것도.
"이런 걸 다 간직하고 있다니. 놀랍다..."
"방이 좀 어지럽지? 좁구. 잠깐만 기다려."
은경은 인상을 깊게 쓰며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리고 있었다.
"부모님이랑은 왜 같이 안 살아?"
"후후. 묻지 마라. 그냥 그런가 보다 해. 문제가 좀 있었어."
"그래..."
은경의 방은 아담했다. 자취방들이 다 그러하 듯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그마한 부엌이 있고, 방이 있고, 화장실은 물론밖에 있고. 그런 자취장의 원칙에 충실 한 듯한 그 방을 보며 재혁은 갑자기 은경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어린 나이에 홀로 일어서 보려는 노력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사람냄새가 나는 그 방에서 재혁은 은경이 오늘 하루 종일 떠들어 댄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사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은경은 그러했다. 방안 가득히 베어있는 고독이며, 벽에서 묻어나는 듯한 우울한 그림자들... 재혁은 그런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벽은 파란 색이었고, 창은 하얀색이었다. 이 곳에서 빨간 색과 검은 색이라곤 은경의 입술과 옷뿐이었다.
"외롭지 않아? 혼자 있으면?"
"아니. 괜찮아. 이젠. 처음엔 너무 외로웠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커피잔을 들고 들어오는 은경과 함께 들어온 것은 향내 가득한 헤이즐럿의 향이었다. 방안을 더럽히기 싫어서 커피메이커도밖에 둔다는 은경의 말에 재혁은 웃었다.
"깨끗하다. 여자 방 답네. 근데, 언제부터 여기서 혼자 산거야?"
"음... 좀 됐어. 대학에 입학하구. 1학년 때 였을 거야. 아마."
은경은 졸립다면서 눈을 한번 비비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베개를 머리로 가져다 댔고, 재혁은 벽에 기대어 책장에 꽂힌 책들을 눈으로 하나씩 읽어내려 갔다.
"책이 많네. 전공 서적 말고도 책이 많다야. 지성인 답네."
"후후. 많아야 너 만큼이나 읽었겠니. 넌 공부도 잘 했으니깐, 저런 건 다 읽었겠지?"
아니. 다 읽지 않았어. 재혁은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재혁아. 오늘 만난 게 어떻게 보면 우연일 수도 있고, 인연일 수도 있을거야. 그치?"
"무슨 말이니?"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넓은 세상에서 어떻게 널 거기서 볼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묘하다.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잖니. 대학로라는 데가."
"그건 그러네."
방은 둘의 말소리를 빼면 후루륵하는 커피 마시는 소리 밖엔 들리지 않았다.
침대위에 있는 은경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잠이 들었는지 아닌지 몰랐다. 재혁은 그런 은경이 보고 싶어졌다.
재혁은 침대위로 올라가 가만히 은경의 옆에 누웠다. 은경은 잠이 든 것 같았다. 가만히 쳐다보는 재혁의 눈을 보진 못했다. 은경의 손을 가만히 재혁은 자신의 손에 가져다 댔다. 거칠었다. 은경을 바라보는 재혁의 눈빛을 느꼈을까. 은경은 눈을 떠 일어서서 불을 껐다. 갑작스런 어두움에 재혁은 움찔했다. 은경은 곧 작은 등으로 그 어두움을 몰아냈다. 침대에 누워 재혁에게 손을 얹는다. 재혁은 자신의 팔을 은경의 목뒤로 옮겨 베개를 대신 해 주었다.
재혁은 빨간 빛을 볼 수 없었다. 까만 색만이 보였을 뿐이다. 빨간 빛을 입으로 느끼면서 눈으로는 까만색을 보았다. 야릇한 느낌이었다. 눈을 뜨면 파란 색이 눈앞에 펼쳐지고. 눈을 감으니 빨간 색과 검은 색의 조화로 더욱 부드러워 졌다. 재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세가지 색의 느낌은 더 해 갔고, 그 세가지 색 이외의 색을 더 볼 수 있었다. 까만 빛으로 시작되었던 재혁의 눈은 어느새 파란 색이 점령을 하였고, 곧 빨간색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짙은 빨간 빛이 침대에 물드는 것을 보았다. 재혁은 눈을 감고 까만 빛을 보았다. 다시 눈을 뜨고 빨간 빛을 보았다. 그렇게 빛은 재혁을 가만두지 않았다.
나란히 누운 침대엔 두 개의 빛이 있었다. 빨간 색과 검은 색. 전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색. 두 개의 빛을 위에선 또 하나의 다른 빛이 그 두가지 색을 감싸안았다. 온통 세가지 색으로 섞어 놓은 그 조그만 공간에서 빨간 색과 검은 색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빨간 사과 향과 검고 답답한 입김이 온통 방안을 휘감고 돌았고, 파란 빛마저 이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색을 재혁은 싫어했다. 재혁은 S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이다. 졸업작품으로 빨강과 파랑, 검은 색만으로 만들어 놓은 보잘 것 없는 작품으로 재혁은 일찌감치 자신의 길이 이 곳이 아님을 결정지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발견하진 못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도 모르는 흔들리는 헤매임으로 버티기도 힘든데, 무엇을 깨닫겠는가.

빨간 빛에서 까만 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재혁은 생각한다.
'...내일도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 아침에 일어나며 저녁에 일어날 일을 모르다는 것이 너무나 서글프다. 어찌 일개의 인간이란 게 이리도 약할 수 있는가. 내일은 있는가. 자고 일어나면 오늘일 뿐. 항상 오늘만 반복되는 일상에 내일이란 있을 수 없다. 오늘만이 존재하는 인생. 난 오늘 빨강과 파랑, 검은 색을 모두 보았다. 그것도 수십번을. 희망적이지 못한 색을 계속 보아서 눈이 피로하다. 너무나 많이 본 것 같다. 피로하다. 정말이지 이젠 이런 색은 섞지 말아야 겠다. 그리고, 이젠 좀 쉬어야 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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