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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소설

권태6

6

오늘은 일요일이다. 빨간 글씨의 날. 쉬는 날. 휴일. 재혁은 다이어리를 보고 알았다. 시간개념이 없는 인생이야. 자조섞인 목소리로 웃는다.
휴일이라 그런지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안은 북적였다.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 나온 가족, 애인의 팔이 휘어져라 감싸안고 앉아있는 연인들, 솜사탕과 아이스크림이 안팔려 인상을 잔뜩 찌뿌린 아저씨, 땀이 비오듯 하는데도 농구에 열심인 학생들. 그 사람들 속에 하나의 인간이 지나간다. 사람속에 있으니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재혁은 느낀다.
"저...실례합니다. 신분증 좀 봅시다."
"예?"
"신분증요. 오늘 여기서 집회가 있다고 해서요. 대학생같은데..."
고개를 돌려가며 거리를 걷느라고 경찰관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 했다. 주민등록증을 꺼내어 건네주는 재혁의 지갑을 낚아챈다.
"학생증 있어요?"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말한다. 주위의 사람이 많아서 일까. 아니면, 하는 일이 힘들고 지쳐서 지겨워진 까닭일까.
"학생 아닌데요."
"예. 됐습니다."
경찰관 한 명이뭔가를 적을까 하다가 이내 주민등록증을 다시 건네주고 재혁을 지나간다. 옆에 서 있던 다른 경찰관이 실례했습니다란 말과 함께 먼저 가는 경찰관을 따라간다. 재혁은 뒤로 돌아 그 두 경찰관을 바라본다. 제복. 그래. 사람들은 항상 제복을 입길 원하진 않아. 어린 시절부터 획일화된 옷을 강요받았던 사람들. 개성이 말살된다고까지 목에 힘을 주며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재혁의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 간다.
오후의 햇살이 뜨겁다. 노출의 계절.
재혁은 옷이 짧은 사람들을 보고 해와 바람의 싸움얘기를 생각해 낸다. 해와 바람중에 어떤 것이 나무꾼의 옷을 벗길까? 우리 엄마의 물음이었다. 재혁이 5살때였을 것이다. 재혁은 해와 바람중에 어떤 것도 못벗긴다고 대답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니? 재혁아?"
놀란 눈으로 재혁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은 커졌다.
"몰라요... 그냥 그렇게 생각해요."
재혁은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재혁의 생각으론 사람의 옷이란 그렇게 쉽게 벗겨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사람의 옷은 쉽게 벗겨지지 않아. 벗길 수 없어. 하지만, 재혁의 그런 생각이 20여년이 지난 오늘 알게 되는 것은 아닌지.
살이 훤히 내비치는 옷을 입은 사람,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사람. 재혁은 그 해와 바람의 이야기의 정답을 오늘 알아낸게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전엔 왜 미처 몰랐을까. 사람의 옷은 해나 바람이 벗길 수 없다. 사람의 옷은 사람이 벗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혁의 걸음이 멈춰진 곳에서 그 문제의 해답을 볼 수 있었다.
두 어개의 칸을 만들어 놓은 무대에서 예술작품으로 보이는 공연을 하고 있는 두 남녀를 보았다.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 찬 곳에 들어선다. 나가려는 사람, 들어오려는 사람. 두 남녀의 행동은 아무런 말이 없이 진행된다. 문제는 두 남녀가 나신라는 것이다. 벌거벗은 몸에 온통 물감을 칠해놨다. 바디페인팅.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것이 생각났다. 행위예술이라고 했던가? 기억은 가물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명했다. 그 두 무용수의 얼굴은 무표정. 그 무표정에 호감이 갔지만, 더욱 재혁을 이끈 것은 그 물감의 색이었다. 세가지 색. 빨강. 파랑. 검정. 세 가지 색으로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색을 이뤄낼 수 있는지 놀라웠다. 재혁은 눈을 떼지 못한다. 뭔가 예술에 대해 깊은 소양이 있는 양,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들은 왜 옷을 벗었을까. 왜 옷을 벗고 표현을 해야만 했을까. 더운 여름날의 해와 바람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왜 옷을 벗을까. 재혁은 생각한다. 사람들이 옷을 벗긴거야. 그래. 사람들이 저들의 옷을 벗길 수밖에 없었어. 사람들의 옷이란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냈지만, 결국 사람들이 다시 벗기고 있어. 참. 억지 논리다. 하지만, 재혁은 그러한 생각에 휩싸여 쉽사리 그 곳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7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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