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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詩

일찌기 나는 - 최승자

일찌기 나는 /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 당신 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쥔장의 말)
최승자의 과거가 은연 중 떠오르게 만드는 싯구가 여럿 보인다. 곰팡이, 오줌 자국, 시체, 쥐구멍... 내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더욱 공감을 하게 만든 단어의 흐름이 퍽 마음에 든다.

 
그러나 인생은 공허함만은 아닐 것이다. 52년생인 최승자는 이미 그것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를 일. 이 시는 대체로 그녀가 30대에 지은 것으로 보여진다. 대략 내 나이겠지. 이 쯤이면 저런 흔적 하나 남기고픈 욕망은 글쟁이라면 누구나 갖게 된다. 때이른 자서전 쯤?

 
빗자루로 먼지 쌓인 다락방을 쓸어내는 듯, 깔끔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가 마음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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