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집 며느리가 아무나 되는 것인감?"
-충남 외암리 민속 마을 최황규씨
예로부터 대대로 전통을 고수하며 내려오는 종가집은 그 말자체로도 훈훈함이 배어있다. 그러나 종가집의 맏며느리로 들어와 고된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네 어머니들. 충남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에 '연엽주'를 만들며 200여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최황규(58)씨를 만나보았다.
☞ 무형문화재 11호 지정된 '연엽주 제작자'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 당시 시가로 3억정도의 금액을 고종황제가 직접 하사한 집이 충남 아산시 외암리에 있다. 바로 이 집 주인인 이득선(59)씨 할아버지는 일제시대때 '판서'였는데 그 이름을 지금은 제대로 고쳐 '참판댁'이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관광객들을 위해 푯말까지 세웠다.
중요 건축 문화재 195호 지정되어 있는 이 집은 'ㅁ'자형 구조로 되어 있고 돌담이 집 주변으로 늘어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베어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5대 선조때부터 내려오는 '연엽주'가 국내 유일하게 이 곳에서만 만들어져 해마다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태.
이런 종가집에 최황규(58)씨가 이득선씨의 아내로 시집을 온 것은 지난 1966년 봄이었다. 충남 청양이 고향인 그녀는 '최익현'의 후손으로 30여년을 '이씨' 종가집의 며느리로 살아왔다. 종가집의 며느리로서의 삶도 그렇지만 대대손손 내려오는 '연엽주'의 제작 방법을 그대로 전수받아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덕택에 현재 '연엽주'로 무형문화재 11호에 지정되어 있다.
"힘든 게 많았지. 종가 시집살이가 뭐 그리 쉽겠어. 매일 같이 같은 일을 잘 해 놔두 표 하나 안날만큼 큰 집이 원망스러웠지 뭐. 근데 작년에 부엌을 고치고 나선 조금 수월해졌어."
130여년을 기왓장하나 바꾸지 않고 살아오다 정부의 지원으로 지난해 부엌을 고쳤다. 또한 장작불을 때며 겨울을 지내왔었는데, 보일러도 놓아 온 방이 윗묵·아랫묵 할 것 없이 훈훈해졌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것도 있었지만, 3남 2녀를 길러내면서 큰 아들에게 시집 올 며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면 이유였다. 신세대 여성들이 장작불 때고 우물로 물을 길어먹는 집에 시집올 리 만무했던 것. 다행히 현재는 맏며느리를 보아 내후년께 종가집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 가까스로 며느리 들여
"며느리가 이 집 생활을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별로 안해. 100% 마음에 드는 며느리는 아마 없을께야. 하지만 그래도 심성이 고와. 매일같이 안부전화도 넣고 종가집에 들어와 살고 싶다고 하더라구. 한편으론 또 그 아이에게 '연엽주'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해."
현재 온양시내 직장에 근무하는 큰아들과 맏며느리는 내후년께 이 집에 들어올 예정이다. 며느리가 들어오면 종가집의 기운을 이어받고 130여년을 이어온 '연엽주'의 제작법도 가르쳐 대를 이어 줄 계획인 것.
연엽주는 약 200여년 전인 5대 선조때부터 내려오던 이씨 가문의 귀한 술이다. 5대선조셨던 할아버지가 당시 '비서감승'(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면서 내놓은 '몸에 좋은 술'이 바로 연엽주였다. 연엽주의 탄생 비화는 이렇다. 당시 온 나라에 가뭄이 들어 상소문이 궁궐에 쏟아졌는데 임금이 직접 백성들의 굶주리고 궁핍한 생활상을 보고 '몸에 이로운 술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연엽주인데, 당시 그 비법을 세세하게 기록해 놓기도 했다고 한다.
"몸에 이로운 술"이라고 자랑하는 이씨의 말처럼 맛이 독특한 연엽주는 그 제작이 수월치 않아 현재 주문 생산만 하는 형편이다. 연엽주 제작방법은 우선 연근을 비롯해 멥쌀과 누룩·찹쌀·솔잎·감초 등 6가지의 재료에 도꼬마리(개울에서 서식하는 대추씨같은 풀이름)와 이팥·녹두·옥수수·엿질금 등을 더 넣고, 항아리에서 봄에는 7∼9일, 여름에는 4∼5일을 푹 익히면 황색을 띤 구수한 술이 완성된다.
수백년간 내려오는 '연엽주' 제작 방법을 이씨의 어머니들과 이씨의 며느리였던 최씨만이 알기에 종가집 며느리의 삶이 더욱 고됐을 지도 모른다.
☞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에 삽니다"
방이 40칸이나 되는 이 집에서 현재 사용하는 방은 3개에 불과하다. 예전에 사랑채와 할아버지가 거주하시던 방, 문지기 방 등 모든 방을 사용할 때에 비하면 며느리의 거친 손에 물 묻힐 일이 조금은 줄어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 만큼 황량해 진 것도 사실.
현재 막내아들이 군대에 가있어 건넌방이 그대로 비어있는데 안방과 건넌 방, 부엌 등이 현재 최씨의 손길이 닿는 곳의 전부다. 그러나 이 큰집을 보존하기 위해선 다달이 대청소를 해야 한다. "내 손이 안가는 데가 없어. 작년까지만 해도 개울에서 물을 길어와 썼기 때문에 더 힘들었지. 지금은 나은 편이야. 싱크대가 들어왔잖아.(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큰집에 살려면 그만큼 기가 세야하는 것 같애. 기가 약하면 금세 시름시름 앓다가 죽지."
이런 이유로 최씨의 며느리 생각이 남다른지도 모르겠다. 다소 '담력'을 필요로 하는 며느리의 입성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큰집에 사는 덕분인지도 모르겠으나 세상에 연엽주가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중 프랑스에서 유학온 대학원생들은 몇 달간 집조사를 하더니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에 산다"고 했다고 한다. 종가집 며느리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최씨는 "겨울이 제일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아무래도 얼어있는 개울을 깨 물을 길어와야 했고 장작불로 방을 뜨근하게 만들어야 했던 겨울이 제일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 그녀의 손은 거칠게 마디지어 있었다. 쓸만한 로션 한 번 제대로 발라본 적 없는 그녀는 "그러나 종가집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환하게 웃었다.
"요즘애들은(여성을 칭함) 남편이랑 자식, 자기 밖에 모르는 것 같애. 그러면 안되거든. 전통을 가꿀 줄 알아야 나라가 살지. 햄버거나 먹고 피자나 먹으면서 꼬부랑 말하면 이게 조선인가? 미국이지." 훗날 미국의 식민지가 될까 두렵다는 그녀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 '내집'이라는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
얼마전까지 큰아들과 사귀던 대학원생이 "집이 너무 커 귀신 나올 것 같다"고 말해 한 소리 했던 기억을 들춰내며 그녀는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해. 그래서 요즘은 남편이랑 현실적인 얘기를 자주 하지"라며 컴퓨터 교육과 운전면허는 필히 따야한다고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막내아들에게 PC 교육을 시키고 운전면허학원에 등록시키는 등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단다. 전통만을 고수했던 지난날의 종가집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렇듯 현재 여성이 천대받던 시대가 물러가면서 종가집의 명맥도 다소 그 기운이 소멸되어 가는 듯 하다. 가문을 내세우며 여성의 삶이 힘들었던 과거가 이제는 여성 상위 시대라 일컬어지며 많은 진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현재 종가집 며느리로서 30여년을 살아온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가 종가집에 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러워서 힘들어. 다른 집들처럼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내집이다'고 생각해야지. 그래야 금세 세월도 흘러가고 자식도 낳게 되는 거여."
서울우유 게재(2000년 4월)
[종가집 며느리의 삶] - 충남 외암리 민속 마을 최황규씨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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