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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folio/일반기사[2003~2007]

[기획]전생이야기

전생을 기억하십니까?
최면을 통한 전생 체험 … 가슴으로 느껴야 가능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 즉 ‘윤회(輪廻)’를 믿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불교 신자일 지도 모른다. 이 말은 중생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는 불교사상에서 유래한 말이기 때문이다. 윤회는 산스크리스트의 삼사라(sasara)를 번역한 말로, 전생(轉生)·재생(再生)·유전(流轉)이라고도 한다. 전생의 기억, 누구나 한번 쯤 호기심으로 대해봤을 주제임에 틀림없다.<편집자주>

■ 전생... 전생... 전생.
전생이란 말은 BC 600년경 <우파니샤드(優波尼沙土)>의 문헌에서 비롯돼 대중에게 전파됐다.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세계에 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천상(天上)의 육도(六道:六趣)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 우리들 앞에 있는 축생, 예를 들어 파리나 모기 등도 전생에는 인간이었던 것이 바뀌어 태어났는지도 모르며, 또 장차 우리들이 저승에서 파리·모기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도 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와의 총체인 업(業)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
또한 이 업은 이승에 있는 우리들의 상식을 초월하여 판정되어, 선업(善業)에 의하여 선의 세계에, 악업에 따라 악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한편 부분적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 중에도 이 전생을 말한 이가 상당수 있었다. 예를 들면 니체의 영겁회귀(永劫回歸)사상 등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
다음은 미국의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전 세계에서 윤회에 대한 사례를 약 2천여 건 수집한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꼽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스티븐슨 교수의 자료를 토대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란 서적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전생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성별의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서부 벵갈의 돌란 미트라(Dolan Mitra)와 미얀마 북부의 마 틴 아웅 묘(Ma Tin Aung Myo)는 자신들이 전생에 남자였다고 주장했으며, 나이를 먹어가면서 남자아이의 옷을 입고 남자아이들의 놀이를 즐겼다. 1967년 8월 8일 태어난 돌란은 세살 때부터 오빠의 옷을 입기 시작했으며, 더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축구와 크리켓을 가장 좋아했다.
그녀의 어머니인 코니카 미트라가 오빠의 옷을 더럽힌다고 심하게 꾸짖자, 그녀는 부르드완에서 오빠보다 더 큰 소년으로 산 적이 있다고 항변했다. 부르드완은 그녀의 집이 있는 나렌드라푸르에서 75마일 정도 떨어진 마을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부르드완으로 데려다달라고 울면서 떼를 썼다. 그리고 부모가 청을 들어주지 않자 크게 낙담했다. 결국,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부모들이 그녀를 부르드완으로 데리고 가는데 동의했으며, 그녀의 주장은 그 진실성이 입증되었다.
1971년의 첫 번째 방문에서는 돌란이 전생에 살던 집을 확인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1972년 5월의 두 번째 시도에서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안나푸르나 사원의 푯말이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한 돌란은 꼬꼬불한 길을 지나 아나트 샤란 데이의 집까지 거침없이 걸어갔다. 데이의 막내딸인 리타가 나와 돌란을 맞아들였다.
돌란은 집안 구석구석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이방 저방을 돌아다녔으며, 방안에 물건들을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리타의 오빠인 니쉬트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니쉬트는 학생이며 유능한 운동선수였는데, 1964년 7월 25일 캘커타 병원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한 젊은이였다. 돌란은 여러 명의 여자들 중에서 니쉬트의 어머니를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된 확인 실험에서 친척과 친구들을 정확하게 가려내었다.
마틴 아웅 묘의 전생에 대한 기억은 더욱 인상적이다. 1953년 태어난 그녀는 네 살 때 처음으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 날 그녀는 아빠와 함께 밖에 나갔다가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엉엉 울었다. 그녀의 행동을 나무라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총에 맞아 죽었어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나툴이라는 마을에 주둔하는 일본 군인이었는데 비행기의 기총소사를 받고 죽었다고 했다. 그녀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큰 혁대를 찬 자신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리고 비행기가 급강하하면서 사격을 퍼부을 때, 자신은 웃통을 벗은 채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고 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가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남자아이의 옷을 입고 군인 흉내 내는 것을 즐겼다. 열 두 살 되던 해, 그녀는 여학생 교복을 입을 것을 강요당하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열아홉 살 때에는 자신의 성별(性別)을 완전히 부정했다. 그녀는 계속 남성복을 입었으며 남편을 원치 않았다. 그 대신 마음에 드는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 전생 연구가 스티븐슨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일부분의 아이들만이 전생을 자각하는 것일까? 유아기의 어린아이들이 전생을 기억하는 빈도수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해도 그들에게 환생이 제한되어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스티븐슨 박사는 말한다.
희미한 기억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릴 수 있는 자극이 있다면, 가령 특정한 인물을 만나거나 특정한 장소에 감으로써 자극받을 기회만 주어진다면 환생은 더 폭넓은 현상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느끼는 '데자 부(Deja vu)' 현상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흔히 있는 일이다. 이 기시(旣視)현상은 전생의 기억이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꿈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다.
꿈과 데자부 현상은 전생의 삶에 대해 극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환생을 특정 개인뿐만 아니라 대중에게까지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유아들의 즉흥적인 발언이다. 그들은 자의식이나 사회적인 조건에 물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환생에 대해 가장 회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도 다음의 경우를 접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라무’라는 2년 9개월짜리 아이는 이상하리만큼 헬리콥터에 집착했다. 그는 자신이 인도 공군 소속의 비행사였다고 주장했으며, 헬기를 조종하는 동작을 취하면서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 동작은 너무나 정확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 토론토에서는 두 살짜리 어린아이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는 새파랗게 질려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이가 얼마나 놀라서 떨었던지 그 비명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극도로 무감각한 사람이었으리라. 아이의 엄마가 “바보처럼 굴지 마. 엘리베이터가 널 죽이지는 않아.”라고 말했지만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에는 엘리베이터가 날 죽였단 말이야!”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유아들의 전생담을 수집하고 대조해본 결과, 이언 스티븐슨과 히멘드라 배너지는 환생이 실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배너지는 24년 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항상 이런 현상을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하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환생을 믿게 만드는 사례는 점점 늘어만 갔다.”
스티븐슨은 배너지보다 훨씬 더 냉철하고 지적으로 엄격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주도면밀한 전문가도 결국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이성적인 사람조차도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환생을 믿을 수 있다. 내가 말하는 믿음은 종교적인 교리와 문화적 전통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 엄밀한 증거에 입각한 것이다.”
이러한 증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모든 어린이들을 새로운 관심과 존중으로 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주목할만한 아이들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을 단순히 부모들의 유전자 조합체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성장을 위해 태어난 존재로 보는 시각을 넓혀야 하며, 가족은 단지 그들의 최신형 무대를 위한 소품에 불과하다는 교훈 말이다.
이언 스티븐슨 박사와 히멘드라 배너지는 전생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아이들을 찾아 알래스카에서 자이레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것은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분야에 매진했음에도 불구하고 협력관계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유아기의 기억에 대해 20년이 넘도록 선구적인 연구를 해온 이 두 사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연구팀의 도움을 받은 스티븐슨은 어린이들을 조사한 2천건 이상의 사례들을 초심리학 분과의 컴퓨터에 입력시켰다. 배너지는 그의 부인이며 유일한 조력자인 마기트의 도움을 받아 1,100건 이상의 사례를 수집했다. 이 작업은 1955년부터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 그의 조국인 인도의 한 대학교수는 그에게 “이런 일을 하다가는 당신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길 것이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배너지는 그런 충고가 일리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그 당시에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기존의 과학체계는 환생에 대해 배타적이고 냉담한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배너지는 환생이라는 이 민감하고 논쟁적인 주제를 갖고 거기에 대항해야 한다. 스티븐슨의 저작이 치밀하고 학문적인 스타일을 취하고 있는데 반해, 배너지의 책들은 일반인들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 1957년 인도에 ‘초심리학 협회’를 세운 배너지는 1970년 이래 미국에 살고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연구자로써 자신이 탐정, 법률가, 심리학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는 “진지한 사람들이 엄밀한 증거를 통해 그들 스스로 환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자료체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전형질이나 유아기의 환경적 요인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특정 행동을 환생 이론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친구이며 열렬한 팬인 해롤드 리프 박사는 스티븐슨을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하며 외골수로 파고드는 연구자라고 평가한다. 리프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티븐슨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있는 중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20세기의 갈릴레오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 최면에 걸리는 사람과 안 걸리는 사람의 차이점

△ 최면에 안 걸리는 사람들의 유형
한 마디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최면에 걸릴 수 없다.
1. 백치는 최면에 걸릴 수 없다.
바보의 지능은 전혀 발달하지 않았다. 지능이 전혀 없다고 보면 된다. 바보는 최면술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으며, 최면술사가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 갈지, 왜 그에게 협조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적인 교류가 불가능하다. 바보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지능은 동물에도 못 미친다. 무엇보다도 지능이 매우 낮은 사람은 최면을 이해하지 못하며 뭘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동물은 최면에 걸릴 수 있지만 바보는 최면에 걸릴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동물의 지능이 인간의 것과는 다를 순 있지만, 동물은 바보는 아니다.
2. 모든 것에 대해 늘 의심하는 뿌리 깊은 의심을 지닌 사람은 최면에 걸릴 수 없다.
그의 의심은 그가 최면술사와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 때문에 그는 최면술사에게 협조할 수 없다
3.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빌려 온 지식으로 꽉 차 있을 뿐 자기 자신의 지성은 전혀 없는 사람들은 최면에 걸릴 수 없다. 왜냐 하면 그들은, 지식인들은 최면에 걸릴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식인들이다.
4.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당신에게 최면을 거는 힘이 최면술사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최면술사는 기법을 가지고 있을 뿐,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최면에 잘 걸리는 사람들의 유형
최면은 전체적인 신뢰를 필요로 한다. 왜냐 하면 당신은 어둠 속으로, 미지 속으로 들어갈 것이고, 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며, 당신가 최면 상태에 있는 동안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모든 지식인들이, 지식인은 최면에 걸릴 수 없다는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들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면에 필요한 신뢰는 생각이 아닌, 느낌의 사람을 필요로 한다.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약간의 이해와 용기이다.”
최면은 어디에나 있다. 교육이 최면을 이용하고, 정치가 최면을 이용하며, 시장이 최면을 이용한다. 모두가 최면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당신은 피해자다. 그것을 알아차려라. 만약 당신이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최면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그리고 만약 당신이 완전히 최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당신은 자유이다. 해방된 것이다.

20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