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빵 이야기
어원=포르투칼어 ‘팡’, 기원=BC 2천년경 ‘이집트’
韓 17세기 박연 제주표류 등 서양 빵 전래 기록 남아
■ 빵의 기원
서양 사람들의 주식이며, 어원은 포르투갈어 팡(po)에서 왔다고 한다. 흔히 밀가루를 사용하지만, 보리·호밀·옥수수·메밀·쌀 등의 가루도 사용된다.
빵을 정확하게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BC 3000년경 바빌로니아인들이 밀을 자연 발효시켜 맥주를 만들면서 발효된 밀가루 반죽을 구우면 빵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추정이 있다.
이스트를 넣은 본격적인 빵이 만들어진 것은 BC 2000년경 이집트에서이다. 고대 이집트의 회화와 조각품 중에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굽는 그림이 있고, 당시의 사람들은 이집트인을 '빵을 먹는 사람'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오늘날의 오븐과 같은 돌과 벽돌로 만든 화덕이 있었고 여기에 빵을 구웠다. 로마시대에 제빵 기술이 급속히 발전한 것은 전리품(戰利品)으로 들여온 좋은 재료와 우수한 기술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는 말총으로 체를 만들어 고운 밀가루를 제조하고 설탕을 첨가하여 이스트의 작용을 상승시켜 잘 부푼 질 좋은 빵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빵 전문점(bakery)이 생기고 1세기경에는 제빵업자끼리의 조합이 결성됐다.
그 후 로마제국이 붕괴되고 제빵기술도 한때 쇠퇴하였으나 르네상스를 맞으며 다시 기술이 부활되어 좋은 빵을 만들게 되었다. 1683년 네덜란드의 A.레벤후크가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최초로 이스트균의 존재를 확인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이스트균의 분리 배양이 가능해지고 이스트를 빵발효에 이용할 수 있게 됐다.
■ 세계 속의 빵
제빵법은 크게 유럽풍과 미국풍으로 나눈다. 유럽풍은 다시 남유럽과 중유럽, 북유럽, 영국 풍으로 나뉘는데, 남유럽풍의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와 이태리 빵이다. 이들 지역에는 성형 틀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굽는 방식이 많고 아직도 옛 모양의 빵을 만드는 방식이 남아있다. 프랑스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고정된 빵을 만들며, 가격은 전국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이태리 빵은 프랑스빵에 비해 기술적으로 다소 뒤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원맥의 질이 떨어지는데다 가루를 표백하지 않고 빵을 만드는데 그 원인이 있다. 이태리 빵의 성형은 프랑스와 같고 굽는 것도 같아 틀 없이 직접 오븐에서 구워낸다.
스위스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 나라인 만큼 관광객 상대의 고급 빵을 만든다. 버터를 접어 미는 형태의 과자 빵이 발달했다. 일상용으로는 호밀 5% 정도를 섞는 빵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틀고 다소 작다.
영국은 틀에 담아 굽는 산형 식빵이 발달했다. 그 외에 소형빵, 둥근 빵, 바게트가 있고 시골 빵과 비엔나빵, 하스번스가 있다. 또한 샌드위치를 처음 만든 나라이기도 한데, 영국 빵은 대부분 모난 틀과 둥근 틀을 쓰며 덮개는 쓰지 않고 빵 위에 칼집을 넣는 것이 많다.
독일에서는 흰 빵과 검은 빵을 대략 절반씩 만든다. 검은 빵류인 호밀 빵은 종류가 다양하고 그 대부분이 사우어도우(Sour dough)로 만들어지며 미디움 라이, 펌프니컬 등이 유명하다. 독일 빵은 한 마디로 바삭바삭한 느낌이다. 스톨렌은 독일 특유의 과자 빵으로 잘 된 것은 보존기간이 6개월이나 된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용 스톨렌은 일찍 만들어 저장해 놓기도 한다.
북구에는 질 좋은 빵이 많다. 재료의 선택이나 제빵기술이 꽤 높은 편이며, 호밀 빵이나 하스빵이 많다. 러시아에서는 호밀 빵이 주가 되고 조리 빵도 다양하다.
미국의 빵은 세계 각지의 제빵 특징을 받아들여 찬란한 빵 문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빵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샌드위치가 많다.
■ 한국의 빵, 진빵의 기원
한국에서 증기로 찐 떡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3세기 중엽 몽고가 우리나라를 자주 침범할 당시, <악장가사>에 이미 상화떡 점포가 개성에 차려졌다는 문구가 있으며, “쌍화점에 쌍화 사라 가고 신댄”이라는 민요 가사가 남아 있으니, 증기로 쪄서 만드는 찐빵의 기원은 몽고군이 주둔한 1231년~1258년 사이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이 때부터 찐빵과 찐만두는 자연적으로 발전됐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밀가루를 불에 구워 빵을 만들었고, 중국은 4천~5천년 전에 밀이 도입된 후 구운 빵 외에 증기로 찌는 찐빵이나 만두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한국은 <충주 조동리 선사유적>에서 볼 수 있듯, 밀은 약 3천년 전에 도입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케 하니, 우리나라 빵의 역사도 매우 오래됐다고 볼 수 있다.
■ 빵의 전래
한국에 서양 빵이 처음 전래된 것은 19세기다. 한일합방의 해인 1910년까지를 한국에 빵과 과자가 처음 도입된 시기로 볼 수 있다.
당시 선교사들은 빵과 과자를 우리에게 전래했고,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세계 각국이 통상 조약을 맺고 조선에 자주 드나들었다. 특히 기독교가 용인되자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해 빵을 구웠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빵과 과자의 기원이라 할 수 있겠다.
러시아 웨벨 공사의 처형 손 탁은 고종을 친히 모시고 궁중을 드나들면서 고종이 하사한 토지에 정동구락부를 개설하고 현대식 호텔에 세계 각국의 음식과 빵, 양과자를 만들어 판매했다. 이 것이 한국 최초의 국제 사교구락부다.
이 후 1876년 부산항 일본인 거주지 조계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본과 중국인의 빵과자 상인들이 대거 입국해 그들의 동업조합을 구성해 빵과 과자가 큰 파급을 가져오게 됐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 빵이 전래된 것은 1628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인이었던 존 에리브테(박연)는 동료 두 사람과 인조 6년(1628년) 제주에 표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울로 호송된 이들은 항상 마른 떡(빵)을 먹으며 훈련원에서 화약을 만들었는데, 동료 두 사람은 병자호란 때 전사했으나 박연은 조선 여인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30년 간 살았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보면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식 빵을 만든 연대를 1628년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하멜표류기>를 보면 효종 4년(1653년) 8월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에 표착 후 전라병영성(여수)에 억류 중 배급받은 밀가루로 탈출용 빵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 빵의 영양
밀가루가 원료인 빵은 칼로리원 식품으로 가치가 있으며 단백질도 쌀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밀가루에는 필수아미노산인 리신 등이 부족해 빵 속에 채소와 육류 등이 반드시 조화 있게 곁들여져야 한다.
쌀과 비교하면 비타민 B1과 단백질의 함량은 더 많다. 표백하지 않은 밀가루 빵에는 카로틴이 들어 있어 약간 검은 기가 도는 누런색을 띤다. 호밀 빵에는 양질의 단백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영양상 우수하나 입에 닿는 촉감이 거칠어 소비량이 많지 않다.
■ 제과업계의 전설
<뉴욕제과>
김봉룡 사장은 인천 출신으로 1947년 충무로에 ‘월화당’이라는 상호를 걸고 최 모 씨와 동업으로 빵․양과자점을 시작했다.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그는 1949년 부산으로 내려가 광복동에서 ‘뉴욕제과’라는 상호로 개업했다.
공장시설이라고는 철판 1매 들이 숯가마가 전부였고 믹서도 없어 손으로 반죽을 쳤다. 처음에는 주로 생과자와 양과자만을 생산했는데, 와플, 이지몬지, 밤만주, 생과자떡 등을 만들었다. 아침 7시에 작업을 시작해 그 다음날 새벽 2~3시까지 만들어 점포에 내놓으면 한 개도 남김없이 모두 팔렸다. 이런 성업에도 불구하고 매년 해가 바뀔 때면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낀 그는 휴전이 된 1953년 서울로 올라왔다.
<고려당>
고려당은 한국 빵 과자 업계에서는 유수한 업체로 현재까지 3대를 이어 내려오며 성업 중이다. 1947년 종로 1가에서 창업한 고려당은 한국 최고의 기술자인 공윤택 옹을 기용해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경영방식으로 제품의 종류와 생산 일체를 일임했다.
이에 공윤택 옹도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 만주 등지에서 배운 러시아 케이크나 캔디까지 만들어 판매해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됐다. 피난 당시 부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러시아 양과인 마루깡, 코코아롱구, 초코봉봉 등을 많이 만들었고 특히 세데루의 과자를 한국인 식성에 맞게 제조 판매한 것이 히트를 치게 됐다.
그는 “재료는 최고로, 기량은 최선을 다하라”는 신조를 갖고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풍년제과>
풍년제과는 부산시 부평동 국제시장에서 창업했다. 공장장으로는 당시 유능한 빵 기술자인 심수용을 영입했으며 선호석 사장 역시 기업 경영에 특출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개업 당시부터 최고의 재료를 사용하기 위해 미제 물품을 매점했는데, 때때로 미군 헌병이 와서 몰수해 가는 바람에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다고 한다.
국내 최초 밀가루 수입과 1953년 제2차 화폐 개혁을 계기로 풍년제과는 오히려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선 사장은 은행에서 구화는 일정액 이상 신화로 교환해 주지 않는 데 착안, 점포 입구에 ‘구화폐도 받습니다’ 라는 문구를 써 붙여 어디에서도 취급하지 않았던 구 화폐를 통용시켰다.
<덕수제과>
이봉상 사장은 이북 청진에서부터 재래 ‘옥춘’을 비롯해 각양각색의 캔디를 주로 만들었다. 판매 방식은 도매와 행상을 이용한 소매를 겸했고, 매일 여자 행상인이 30~50명씩 출입할 정도로 성업을 이뤘다고 한다.
6.25 전쟁으로 남하해 포로수용소가 있던 거제도에서 피난살이를 했으며, 그 곳에서도 역시 제빵 공장을 경영하다 수복 후 상경해 1960년 광화문에 덕수제과를 개설했다.
<삼립식품>
1945년 10월 제과공장 상미당으로 시작해 1961년 10월 서울 중구 청계천에서 제빵공장을 하고 있던 삼립 허창성 사장이 양산업체인 삼립산업제과공사로 명의 변경해 출범했다.
1968년 6월 상호를 삼립식품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해 구로구 가리봉동에 대규모 생산라인을 완비했다.
<서울식품공업>
1955년 10월 17일 서울식품공업사로 창립해 1965년 서울식품공업으로 법인 전환했다. 창업주 서청택 사장은 1969년 제빵설비라인 설치로 양산 빵 생산에 들어갔다. 1985년 경기도 안산시 신길동에 제빵 공장을 준공해 주로 빵과 각종 유가공음료, 과자류를 생산하고 있다.
<기린>
1969년 5월 부산 삼립이라는 상호로 김정운에 의해 창립돼 1981년 (주)기린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82년 본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생산하기 시작해 1982년 8월 제과점 사업으로 확장했다.
1999년 ‘독립선언’이라는 식빵을 생산하고 젤라비빵을 출시하는 등 매출 증진에 노력하고 있다.
<샤니>
1972년 8월 한국인터내셔널식품으로 허창성 사장에 의해 출범해 1973년 서울 명동에 샤니의 집을 개설했다. 1977년 10월 22일 (주)샤니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당시 양산빵의 고급화에 앞장섰다.
■ 안흥찐빵
안흥찐빵은 예로부터 그 유명을 달리하여 그 옛날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던 시대 어렵게 구한 밀가루를 여러방법으로 먹거리로 이용하던 시절 막걸리로 밀가루 반죽을 숙성 발효시킨 선조들의 지혜로 찐빵을 만들어 먹었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 서울 강릉간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중간지점으로서 서울에서 출발하든, 강릉에서 출발하든 비 포장도로를 4시간 정도 달려오면 이 곳에 와서 점심식사를 하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지역이라 당시 안흥의 식당집에서는 점심준비를 위해 쌀을 2~3가마씩 씻어 밥을 준비해야 하는 번성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왕래객은 다시 먼길을 가야하는 부담감 때문에 고민을 하였으나 먹거리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도시락을 손쉽게 준비할 수 없었던 그 시절부터 안흥찐빵은 허리춤에 끼고 먼길을 가는 나그네와 함께 장도에 오르던 식품으로서 근세에 와서는 고랭지 채소 경작으로 대부분 생계를 유지하는 농촌 지역에 농부들의 새참거리로 하기진 배고픔에 든든한 먹거리가 되어 줌으로써 농가들이 큰 각광을 받아 오고 있었다.
어렵던 시절 중요한 먹거리가 되어 주었던 찐빵의 전통적 제조 방식을 고수하면서 그 명맥을 그대로 유지해옴에 따라 경제적, 문화적 풍요로움으로 삶의 여유를 갖기 시작한 연대인에게 잊혀져 가던 옛 고향의 정취와 향수를 서서히 자극하여 안흥찐빵을 통하여 그 맛을 느끼고자 하는 이들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고, 한번 맛 본 이들에 의한 소문이 이제는 전국에 퍼져 안흥찐빵을 찾는 이들이 점차로 늘어나 어느새 우리고장의 전통상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찐빵을 만드는 업소 17개가 모여 있는 마을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찐빵을 제조하고 있다. 횡성에서 나는 순국산 팥을 4시간 이상 무쇠 솥에 넣어서 푹 삶아 속을 만드는데, 단팥에는 인공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아 팥의 단맛이 적당하다. 밀가루를 막걸리로 발효시켜, 1시간 동안 방에서 숙성한 다음 찌므로 반죽이 쫄깃하다.
안흥면의 찐빵을 만드는 업소는 1998년부터 늘어나기 시작해 제품 개발과 경영기법을 도입하는 등 성장하고 있으며, 횡성군은 안흥찐빵을 모델로 캐릭터를 개발, 열쇠고리와 장식품 등 다양한 캐릭터상품을 생산하고, 10월 30일과 31일에 안흥찐빵마을 한마당 큰잔치를 연다. 또한 안흥면을 중심으로 우천, 강림 등 주변 관광지를 찐빵마을과 연계, 테마관광 여행지로 조성, 찐빵축제 등 안흥찐빵과 관련된 행사를 열 예정이다.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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