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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folio/일반기사[2003~2007]

우리 생활에 파고든 일본어 잔재(1)-"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우리 생활에 파고든 일본어 잔재 (1)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누구의 잘못도 책임도 아닌 반성만이 필요한 일


올해로 광복 60주년을 맞았다. 구한말을 겪은 세대들의 숨소리도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초 36년간 배웠던 일본어의 잔재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 듯 하다. 특히, 민족의 생명인 ‘언어’에 있어 그들이 자행했던 ‘한국어 말살’은 자의든 타의든 현재까지 진행형인 상태인 것 같다.
일본식 영어표현은 이미 뿌리를 내린 지 오래다. 스포츠 경기에 있어 일본식 영어표현은 위험수위를 넘었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단어 몇몇에도 일본의 잔재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표현이 일본어였어?”라는 대답이 자연스러운 시대다.
조선시대 후반까지 ‘언문(諺文)’이라 하여 천대받고 괄시받던 우리말 ‘한글’. 다시금 ‘언문’으로 홀대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세계문맹퇴치의 날이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이란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어렵사리 운을 뗀다.
참으로 일본은 대한민국을 철저하게 유린했음에 틀림없다. 필자 스스로도 반성하건대, 사전을 찾아보지 않는 이상, 우리말과 일본어를 구분 못하는 상황도 종종 벌어진다. 심지어 기독교도인들이 기도할 때마다 쓰는 ‘예수 그리스도’도 일본어의 잔재라면 더 이상 말하기가 싫어진다. 아니 글을 쓰기가 겁난다.
언어는 사회상을 반영하고 그 사회상은 환경적 요인에 의해 변천해 가는 것이 상례다. 지난 1933년 주시경 선생이 한글맞춤법을 제창한 이래 1989년 단 한번, 개정됐을 뿐인 한글이지만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 생활 곳곳에 파고든 일본어의 잔재가 얼마나 될지 심히 궁금해진다.
10월 9일 한글날을 공휴일로 제정해 1년 중 하루쯤이라도 한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필자의 바람을 담아, 2회에 걸쳐 우리말에 녹아든 일본식 표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외국어 차용하는 타성에서 벗어나야”

일상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식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곳이 전문분야에서 쓰이는 말들이다. ‘콘크리트 양생 중’ ‘오수 차입 관거’ ‘계근 불응 도주 차량 감시’ 등이 그런 것들이다. 법령문이나 공문서도 ‘상환 무자력자’ ‘부동산 명도’ ‘시건장치’ ‘주민 소개 명령’ 등도 일본식 한자어로 채워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반도(半島)’는 반쪽 섬을 뜻한다. 일본인들이 자신의 땅을 ‘온섬’으로 불렀고 우리는 그것의 반쪽 밖에 안되는 ‘반쪽 섬’에 살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쓰였다. ‘산맥(山脈)’도 마찬가지다. 일본인이 쓰던 말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 쓰고 있다. 우리말로는 ‘산줄기’인 산맥은 ‘백두대간’ ‘호남정맥’ 등으로도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국립국어연구원 김문오 학예연구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말은 문화 창조의 힘 있는 도구로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무관심으로 우리말은 점점 위축되어 가고 있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전문 지식과 외국어 능력을 활용해 새 문물에 대한 용어를 그 때 그 때 번역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학계, 산업계, 언론계는 외국어 용어를 차용하는 데 길들여진 타성에서 벗어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반 국민이 쉽게 알 수 있는 용어를 찾는데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또한 학교에서 학생들이 새로운 우리글을 만들 줄 아는 능력을 길러줘야 합니다.”
구한말 우리말에 평생을 바친 주시경 선생은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고 말했다.
우리말 중 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70%라고 할 때, 일본식 한자어 표현은 대단하리만치 크다. 또한 영어교육이 전 국민의 대세로 자리 잡은 이 때, 일본식 영어표현은 또 다른 우리말 폐해를 낳고 있다. 한 여성 잡지의 의류 소개 글과 화장품 설명서에 쓰인 말이다.
‘잔잔한 도트 문양의 시폰 블라우스와 스커트, 블라우스 앞 중심선의 셔링 처리와 스커트의 플레어된 디테일이 로맨틱 요소로 작용한다.’
‘마이크로 릴렉싱 파우더를 주베이스로 천연 다공성 구상 분체를 배합해 피부에 부담 없이 밀착시키며 피부가 편안히 숨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입자가 미세해 모공을 막지 않으며 입자가 매우 부드러워 도포시 편안한 사용감을 부여합니다.’
이게 웬 ‘현대판 이두 문자’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영어를 사용하면 세련돼 보인다는 왜곡된 열등의식이 꿈틀된 결과물인가.

셀 수 없이 많은 일본식 표현들

셀 수도 없이 많다. 거의 생활 전반에 퍼져있는 일본식 영어표현은 그 범위가 매우 방대해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어떤 단어가 순수한 우리말인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는다. 쉽게 바꾸어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습관화된 말들. 식민지 36년의 피해치고는 너무 크다. 과연 일본만의 잘못일까.
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닌 이 상황에 대해 우리 모두 고개 숙여 반성해야 옳다. 우리의 잘못이다. 제2공용어로 ‘영어’를 선택하든, ‘일어’를 선택하든 상관없다. 그저 ‘한글’을 영원히 사용할 것이라면 조금씩이라도 이러한 표현을 바꿔나갈 용기를 지녀야 한다.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최근 해외 유학이 급증하고 있다. 이쯤 되니 우리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매우 뚜렷해 보이기도 한다. 비싼 돈 들여 해외에 나가 영어를 배우는 만큼 우리말에 대해 옳은 사용을 권한다. 노력을 원한다. 개개인이 외교관이 될 필요가 있다.

<일본식 한자어표현>
백묵, 잔업, 각선미, 흑판, 고수부지, 노견, 할증료, 행락철, 선착장, 축제, 발신, 집중호우, 택배제도, 개찰구, 대합실, 보합세, 핸들, 오토록, 오토바이, 샤프, 사이다, 와이셔츠, 점퍼, 스커트, 노브라, 클레임, 네임밸류, 모닝콜, 스킨십, 탤런트, 아파트, 에어컨, 일러스트, 인프라, 더치페이, 오바이트, 아이쇼핑, 추리닝, 핸드폰, 고데, 곤로, 곤색, 공장도가격, 기중, 기합을 넣다, 내역, 다마, 다반사, 담합, 덴뿌라, 역할, 오뎅, 우동, 거치기간, 고참, 구좌, 나대지, 벽지, 산간오지, 생방송, 승차권, 시합, 요금, 익일, 편도, 편승하다, 품귀, 오방떡, 미숀, 독고다이, 가교, 간식, 걸식 아동, 굴삭기... 등등.
☞ 옳은 한글 표현은 10월호에서 알려드립니다.

글/ 고구마(wc55@chol.com)

 

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