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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folio/인터뷰

[에스원2004]빛과 소금-전남 고흥 매곡교회 정도성 목사

“농민들 빚을 조금이나마 줄여드리고 싶습니다”

글/ 원창연(자유기고가)

오래 전‘광수생각’이라는 만화로 유명해진 박광수씨는 한 칼럼에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연말마다 TV에 나와 양로원 고아원을 방문하며 카메라 촬영이 목적인 양 활짝 웃는 고위층들의 봉사활동을 비난하지 말라. 대내외적 홍보가 목적이라도 그러한 봉사가 ‘받는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봉사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봉사는 종교의 색채와 매우 닮아 있다. 가슴으로 ‘民’을 생각했던 예수님・부처님 등 聖人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봉사’의 정의와 매우 닮아 있다.

전남 고흥군 매곡교회 정도성(51) 목사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교지도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봉사활동은 선교자의 것을 넘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된장 목사’라고 불려지는 그의 행보를 면면히 살펴보고자 늦겨울 어느날 그를 찾았다.

“과거 사회에 빚진 자” ... 한때 농민운동가로

전남 고흥군에 도착한 기자는 넓디넓은 들판에 우뚝 솟은 두 개의 교회탑을 보고 탄성을 자아냈다. 교회에 들어서니 이번엔 옹기가 장관이다. 500여개의 옹기가 줄줄이 된장과 간장을 담고 숨을 고르고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항아리. 그것을 뒤로 하니 ‘사회복지관’이란 커다란 건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전남 고흥군 매곡교회 정도성 목사와 부인 신영희씨의 안내에 따라 사회복지관 2층으로 올라서니 그들의 보금자리가 나온다.

“지난 2001년 사회복지관이 완공될 때만 해도 여기 2층에 거주할 생각은 안했어요. 근데, 신도들의 요청으로 2층으로 올라오게 됐죠.”

사회복지관과 된장이 무슨 연유가 있을까 싶어 물었다. 비교적 현대식 건물인 이 곳의 이름처럼 ‘복지’와 관련된 일을 만드냐는, 다소 속세에 물들은 듯한 ‘도시적’인 우문(愚問)이었다.

“과거 저는 사회에 많은 빚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77년 참회를 거듭한 끝에 신학대학을 입학했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죠. 그러던 중 제 고향 전남 고흥에 터를 마련했는데, 농촌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더군요.”

그의 의문은 물음표에서 끝나지 않고 곧 실천에 옮겨졌다. 한때 농민운동가라고 불려진 이유도 모두 이 시기에 시작된 그의 행동 때문이었다.
당시 농촌은 매우 궁핍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전남 고흥의 ‘콩’ 특산물은 제때 정부가 수매하지 않아 헐값에 시장에서 유통됐다. 농민들의 생활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이를 목격한 정목사는 ‘이래선 안되겠다’고 다짐하고 콩 수매를 시작했다.

“이 지역의 최고 특산품은 콩과 유자, 마늘, 수산물 등이 있는데, 황토와 공단이 없는 이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특산품이 바로 ‘콩’입니다. 여기에 착안해 농민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자 일을 벌이게 된 게 여기까지 온 것이죠.”

그가 벌였던 일은 이렇다. 매년 10월 정부가 수매하기 전 그가 얼마분의 콩을 인근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웃돈을 얹어 구매한다. 그런 후 메주를 쑤고, 장을 담궈 매년 봄 시장에 내다파는 것이다. 이치는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그 뒤의 이야기들은 그를 이 고장의 ‘빛’으로, ‘소금’으로 생각하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다.

농민에 콩 수매 ... 실패도 여러번

처음 콩을 수매해 된장을 만들어냈을 때 여러번 실패도 맛봤다. 처음 시작할 당시 빚진 600만원은 아직도 갚고 있다고. 콩과 관련한 서적을 닥치는 데로 섭렵한 것도 이 때 쯤이다. 뭔가 알아야 만들어 낼 것이 아닌가. 처음 40여개의 항아리로 시작한 된장독도 주민들의 도움으로 지금은 500여개를 넘어서고 있다.

“농민에 100% 환원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농민들은 항상 뒤편에 서서 불이익만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누군가 그러죠. 목사가 무슨 사업을 하냐고. 그러나, 저는 사업을 하는 게 아닙니다. 농민들의 콩을 수매해 보다 높은 이익을 그들에게 돌려주고자 생각해 낸 것이니까요.”

어떠한 상황이든 그 것이 언제이든, 시기와 질책은 따라다니기 마련. 정목사를 힘들게 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콩 수매가 궤도에 오르자 정목사는 여러 가지 생각을 또 해냈다.

“돈이 수중에 들어오니 평소 (자녀가 있지만) 홀로 살아가시는 노인들이 생각나더라고요. 무언가 해주고 싶었습니다.”

주1회 도시락 대여섯개를 만들어 방문한다. 자주 들르지 못하기 때문에 한번에 3일치의 도시락을 전달하는 것. 시간과 자금이 허락된다면 더 많은 독거노인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은 것은 자원봉사자들의 한결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정목사도 마찬가지. 그는 “혼자 궁핍하게 살지만 자식이 있어 생활보호대상자에도 오르지 못하는 노인들 위주로 도와주고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만든 사회복지관은 그들의 안식처”라고 말했다.

2001년 완공된 매곡교회의 ‘사회복지관’은 이러한 노인들의 휴식처이자 안식처다. 갈 곳 없는 노인들에게 숙박을 제공한다. 물론, 무료다. 현재 3명이 거주하고 있다. 도시락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회복지관을 짓다 보니 재원이 상당히 필요할 듯 해 보였다.

“된장을 내다 파는 돈으로는 다소 빠듯하지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손놓고 누군가 지원해주기만을 기다릴 순 없잖아요.”

복지관 건립으로 인근 독거노인 수용

지난 15년간 그의 콩 수매 소식이 알려지면서 인근 고흥군, 보성군 등 농민 대부분이 ‘콩’을 경작해 그에게 수매를 의뢰하곤 한다. 참으로 난처하다. 전량 모두 수매할 수 없어 정목사는 ‘가장 높은 가격’에 수매를 의뢰하는 타지 유통 상인을 찾아나서기도 한다.

“곡식 갖고 장난치면 안됩니다. 예전 이 고장에서 악덕 유통상인들의 담합으로 농민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농민들은 왜 항상 가난해야 합니까.”

정목사처럼 무지한 농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은 매우 많다. 매우 많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도시인은 마트에서 배추 하나를 사도 그것이 농민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대한민국 유통 시장은 농수산물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건 ‘안개 정국’이라 할 만큼 어지러운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지 직매’를 내걸고 상경하는 농민들도 꽤 된다.

도시인들의 농간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겠다는 그들의 다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자금 등 여력이 되는 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교통수단이라고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고작인 깊은 산중 시골의 상황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목사의 ‘콩수매’는 이 고장의 ‘빛’이다.

“1년에 두어번 순천대학과 목포대학 등 연구소에서 식품 검사를 나옵니다. 우리가 만든 100% 무공해 된장을 보곤 ‘여기처럼 좋은 품질의 장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유전자 콩이 아닌 100% 전통콩으로 만들어 그러한 것 같아요.”

처음 된장을 만들어 낼 때 지식이 없어 당황했을 때 인근 노인들에게 도움을 얻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을 위해 정목사는 하루하루 된장을 손에 묻히며 산다.

“목회자의 길만 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중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누군가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농촌 한 가구당 약 3천-5천만원의 빚을 지고 있어요. 줄여드리고 싶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정목사의 봉사 활동은 세네개가 넘는 듯 하다. 숫자가 중요하겠는가마는 대충 살펴도 그러하다. 콩을 수매해 된장을 만들어 판다. 사회복지관을 지어 노인들을 수용하고 있으며, 초중고등학생, 대학생 등 총 30여명에게 매분기마다 장학금을 수여한다. 된장 제조를 위해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인근 주민들의 고용창출 효과도 얻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들판위에 핀 두개의 교회탑을 보며 돌아나오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뉴스가 있었다. 얼마전 서울시 강남구・서초구 지역 주민들의 ‘불우이웃돕기’ 실적이 전국 최저라는 기사. 돈과 시간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과 ‘내가 아닐까’라는 자책은 고흥군을 벗어나서도 계속됐다.

Tip 1. 에필로그 - 매곡리의 아랫묵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대체로 관절염과 디스크로 고생하신다. 그래서 지글지글 끓는 아랫묵은 추운 겨울날 몸풀이에 그만이다. 추울 수록 더 찾으며 날로 줄어드는 땔감은 기력없는 노인들에게 생명과도 같다. 매곡교회는 그리 크지 않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두 개의 교회탑은 매우 인상적이다. 매곡교회는 아랫묵과 같은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정목사는 지난 92년 ‘미국 쌀 수입저지와 쌀값 보장 및 전량 수매를 위한 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연행, 폭행 당한 이력이 있다. 그 때 핍박으로 지금까지 다리와 허리 등 치료를 받고 있다. 된장을 만들며 여러번 실신하기도 했다. 그래도 농민들을 살리고자 ‘미국산 콩을 한국에 심어도 그 품질은 한국 고유의 것을 따르지 못한다’는 지론을 펴는 정목사다.

매년 10월 콩 수매에 들어가 11월 메주를 쑤고, 연초에 메주와 된장을 만들어 10여개월간 숙성을 시킨 ‘에덴된장’(식품정식허가등록)은 정목사만의 것이 아니다. 최근 각종 매스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는 “부끄러우며 내세울 것 없다”며 한사코 취재를 거부했던 정목사. 봉사는 곧 실천이라는 단순 명제를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