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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수필

나의 성격(2001)

나의 성격

혹자는 내 성격에 대해 '날카롭고 냉정해 쉽게 곁에 다가오지 못하는 사람' 쯤으로 생각한다. 얼마전 '나의 바램'을 쓰면서 나는 20대를 되돌아 보는 의미에서, 인생의 남은 여정을 여실히 담기 위해서 몇 가지 글을 남기기로 했다는 말을 했다.

오늘이 그 두번째 시리즈쯤 될까.
나의 성격에 대해 운을 떼고 보니, 별로 할 말이 없다. 누구나 태생이 분명하건 아니건, 성격이야 만들어져서 탄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선설을 믿는 내게 '극악무도한 이'들을 보면 과연 그럴까 하는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신문과 방송에 떠들어대는 문자 그대로 수식하지 않은 말들이 오히려 더 공포스럽다.

그러나, 그들도 태생은 선했으리라. 선한 눈동자와 달콤한 말에 눈물을 머금는,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좋은 성격으로 태어났으나, 후천적으로 환경이 그들을 만들었다고 믿는 이들은 오히려 주변 인물들이 아닐까.

좋은 성격이란 뭘까. 오늘 내 성격에 대해 떠드는 시간인데도, 남의 얘기를 주저리 풀어대는 이유도 보다 나은 객관성을 유지하고픈 바램 때문이다. 좋은 성격이란 남과 비교됐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른 이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인간의 성격은 자신 스스로는 단정짓지 못한다.

내 성격. 그래, 내 성격은 한 마디로 '나쁘진 않다'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겪었던 기억들을 되내이건데, 비록 욕설을 들었던 추억도 가끔 찢긴 종이처럼 누더기 상태로 내 흔적을 채워넣긴 하지만 그리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성격의 흐름은 크게 세번 변화를 겪게 됐다. 앞으로 그 변화의 회수가 얼만큼 더 늘어날 지는 모르지만, 내 성격의 큰 줄기는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변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는, 과거 겪었던 아픔들이 반성의 일기장으로 변했기 때문에 같은 오류와 과오를 겪지 않으리란 확신이 섰다는 의미다.

첫번째 변화는 유년 시절에 이뤄졌다. 이 얘기를 꺼낸다면, 별로 좋지 않은 기억들이 많아 내키진 않지만 추후 언급할 내용이기도 하기에 몇 가지 꺼내놓으면 이렇다. 나의 유년 시절은 부유와 가난을 오가는 혼수상태였다는 말이 가장 적합할 듯 하다. 그런 가운데, 가정의 행복은 날아가고 아버지의 담배 연기 사이로 나의 웃음 또한 흩어져 버렸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나의 웃음은 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최근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자리에서도 그들은 날 '웃음'과 '귀여움'으로 기억의 실마리를 풀어냈다. 나의 모습은 그랬다. 그러나, 속으론 그 웃음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방과 후에는 슬픔이 바로 교차됐다. 낮과 밤이 적절하게 섞인 그런 거리를 걷는 기분처럼 기쁨과 슬픔은 방과 후에 이뤄졌다.

두번째 변화는 죽음이었다. 어린 시절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실로 대단했다. 물론, 나의 죽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 느낌 감정으로는 '죽음은 그 사람이 죽는 것 자체에 슬픈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다시는 추억을 만들 수 없음에 슬픈 것이다'란 명제를 두뇌에 각인 시키게 됐다.

그로 인해 난 조금은 우울하게 지냈고, 하늘 보는 횟수도 늘어나게 됐다. 그 때 부터 감성적인 면이 발달케 됐던 것 같다. 지금도 TV 앞에 앉아 '인간시대'류의 다큐를 보게 되면 눈물을 혼자 머금곤 한다. 내 얘기도 아닌데, 감정이입이 쉽게 되는 걸 보면, 당시 느꼈던 슬픔이 매우 컸으리란 짐작이다.

세번째 변화는 여자였다. 내 인생의 여자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실로 내 성격을 마음대로 뒤바꾼 것은 바로 무생물이 아닌, 생물... 그것도 향기가 가득 흐르는 내 사랑. 바로 여자였던 것이다. 지금도 내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의 성격은 부모나 동성의 친구가 건드리지 못하는 치외법권적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성의 힘, 즉 사랑의 힘만으로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 이 어찌 놀라운 것이 아니랴!

난 경험해 본 바로는 '욱'하는 성미는 군대 시절 갖게 됐고, '욱'에 '욱'을 더하는 성격은 여자로 인해 발생케 됐다.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과 이념만으로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집어 삼키는 '능력'을 보유하게 됐던 것이다. 군 시절 동갑내기 고참과 '맞짱'을 떴던 용기는 이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리라.

그 슬픔이라는 명제를 알게된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됐으니 말이다. 나란 인간은 그렇다. 여자 때문에 슬퍼했고, 여자때문에 다소 성격의 변화를 갖게 됐다. 덕분에 감성적 이념은 더욱 풍부하게 날 휘감게 됐지만.

사람의 속이 새까맣게 타버린다는 의미를 알게 됐고, 심장에 바늘을 꽂을 수 없음에도 꽂히는 느낌을 알게 됐고, 소리 지르고 싶지만 지르지 못하는 인내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머리 끝까지 오르는 '화'를 눌러 내리는 초인적인 힘은 아마도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남자들 속을 썩일 진 몰라도 내게 대했던 그녀는 오랫동안 뇌리에 맺혀 있을 것 같다. 너무나 가혹하게 날 대했기에, 너무나 내게 잘못을 저질렀기에.

나란 인간은 이렇다. 여기까지가 내 성격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전부는 아닐 것이다. 모두 주관적인 판단과 결정에 의해 키보드를 눌러댄 것이기에, 더욱 부끄럽기도 하다. 나란 인간의 성격은 앞으로도 변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 하다.

내 인생의 키워드를 '사랑'으로 삼는다면 그 이유는 더욱 명확해 지겠지.

하지만, 이젠 사랑 앞에 '용서'와 '이해', '포용' 이라는 큰 단어의 의미를 새기게 됐다. 물론, 경험을 통해서.

내 성격을 다시 되짚어 본다면, 처음 보는 이들은 많이 망설일 것이다. 나란 인간은 한없이 '정'에 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인간'과 '일'은 별개라는 것도 배웠다. 친구에게 배신도 당해봤다. 속는 놈이 바보라는 말을 절실하게 느꼈던 그 날, 난 깨달았다. 바보 같은 짓 말자.

그러나, 내 성격 밑바탕에 짙게 깔린 것은 역시 '정'인 것 같다. 잔정이 부족해 보이기도 하고, 냉정하게 말을 곧잘 해대기도 하지만 나란 인간은 본시 누구에게 싫은 소릴 잘 못한다. 어투가 느린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느리게 살다보니, 예전의 성질 급했던 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일상이 편해지며 느슨해 짐을 서서히 느낀다.

이대로가 좋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이가 제발 다른 마음 먹지 않길 바라는 기도 뿐이다.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으론 울고 있는 것처럼.

내 모습은 그저 그대로 보이는 그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성격도, 품성도 모두 사람들과 부딪히며 만들어져 가는 법. 성인 군자가 아닌 이상, 때론 욕을 먹고 때론 칭찬도 듣는 것이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독단과 독선을 피하고, 주체성을 갖고 내 사랑과 내 꿈을 향해 달려가면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지금의 내 성격,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다면 비교적 좋다고 얘기해도 되겠지? ^^

 

2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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