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 일상의 대화
1.
오전 6시 30분, 숨고르기에도 바쁜 기상 시간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건 뭔지. 오늘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시계가 환하게 밝아온 아침 햇살을 맞는다. 눈을 조금 뜨면 햇살, 조금 더 뜨면 방 안의 형체가 가물거린다.
화장실로 향하는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다. 우유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30분도 안돼 집을 나서면 싱그런 바람이 뺨에 부대끼며 아침 인사를 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만원 버스가 이미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저 것 놓치면 지각인데. 매일 반복되는 아침 행사인데도, 매번 5분 늦게 일어나 맞는 지각 행사다.
젖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여자의 샴푸 냄새가 가을바람에 실려 코끝을 간질인다. 잠시 여유로운 생각에 잠길 즈음, 아차! 지갑!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은 왜 그리도 먼지.
느지막이 차에 올라 자리라도 있으면 눈꺼풀은 천근만근. 지난 밤 피곤함을 뒤로 하고 단잠에 빠지다보면 정류장을 지나치기 일쑤다. 이럴 때 마다 누군가의 손마디가 그립다. 어깨를 두어 번 흔들어 깨워주면 얼마나 좋을까. 시린 손마디라도 좋은데.
넓디넓은 서울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출퇴근길 ‘환승’은 필수 조건이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다시 지하철에서 버스로. 두세 번 거치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몸도 익숙해졌는지 눈 감고도 걸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 다소 먼 거리를 앉아 갈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 손잡이를 기둥삼아 몸을 지탱한다.
무료로 나눠주는 지하철 일간지는 긴 나무토막을 짧게 보이도록 하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 그것이 무슨 ‘무기’라도 되는 양, 도시인들은 모두들 그것을 들고 아침 마실을 나간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그것으로 때려잡을 기세로.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신문을 잽싸게 가로채는 날쌘 남학생의 행동에 기운이 빠진다.
2.
다행히 자리가 났다. 그런데 앉아보니 오른편에 앉은 남자의 다리가 너무 벌어져 있다. 왼편의 아주머니는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앞에 서 있는 아가씨의 옷매무새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으며 ‘평가’하는 듯 하다. 오른편 남자 때문에 다리를 오므리고 갈 수 밖에 없다. 불편하다. 한 마디 할까. 곤히 자고 있는 걸 깨울 수 없어 참는다.
원하지 않는 ‘압박감’으로 인해 오히려 포근했던 것일까. 잠에서 깨니 못 보던 지하철 정류장이다. 문이 닫힌다. 오른편의 남자도, 왼편의 아주머니도 없다. 지하철은 나 혼자 뿐이다. 종점이다.
친절한 성우의 멘트로 종점을 알리는 지하철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도시인들의 ‘무기’를 걷어내는 껌씹는 아주머니들뿐이다.
3.
다행히 아무도 없다. 문 옆에 조그만 책상에 앉은 여직원만 조용히 웃으며 날 맞는다. 굿모닝이라는 말과 함께.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에 눌려 고개를 숙이니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모두들 회의에 집중하고 있다.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칼진 음성이 사무실의 벽을 타고 귀를 때린다. 순간 움찔. 멈춰선 걸음. 너 지금 몇 신 줄 알아? 여기가 놀이터야? 지난 밤 새벽 1시까지 근무한 업적(?) 온데간데없다. 원래 이렇다. 본디 그렇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위안이 된다. 나 혼자만 이렇다면 억울할 텐데. 어쩔 수 없는 근무환경, 바꿀 수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건만 떠나지 못한다. 이것 또한 누구나 그러하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과감히 사표를 제출하고 캐나다 유학길에 오른 김 대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가 사표를 제출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드라마다. 각본 없는 드라마. 그 순간에 대해 한일전에서 2:0으로 지고 있다가 3:2로 역전승 했을 때보다도 통쾌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 혈혈단신으로 마음가짐이 홀가분했을 지도 모른다. 도피성 유학은 아닐 터. 평소 10년 후의 일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거품 물고 자신의 계획을 주장하던 그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떠나고 난 후, 업무는 더욱 가중됐고 주말도 사라졌다. 한 번은 어느 날 아침 이를 닦으며 TV를 볼 요량으로 소파에 앉은 적이 있다. 이를 닦기 시작 한 지, 이미 20초가 더 흘렀을 무렵이다. TV에서는 평소 보지 못했던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아차, 오늘 일요일이구나. 닦던 이를 버리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자니 억울했다. 일찍 일어난 것이 억울하고 정신 차리고 이를 닦았던 나의 뇌세포들에게 미안했다.
내 자리에 앉아 PC를 켜고 잠시 기다리니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그림이 눈을 사로잡는다. 알퐁소 도데의 ‘별’에 나왔음직한 그 언덕과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목동의 어깨에 기댔던 그 밤의 별빛이 키보드 위로 쏟아지는 듯 하다. 부팅 되며 내는 빛에 이런 생각이 들다니, 내가 갈 곳은 결국 그 곳이란 말인가!
1.
오전 6시 30분, 숨고르기에도 바쁜 기상 시간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건 뭔지. 오늘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시계가 환하게 밝아온 아침 햇살을 맞는다. 눈을 조금 뜨면 햇살, 조금 더 뜨면 방 안의 형체가 가물거린다.
화장실로 향하는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다. 우유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30분도 안돼 집을 나서면 싱그런 바람이 뺨에 부대끼며 아침 인사를 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만원 버스가 이미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저 것 놓치면 지각인데. 매일 반복되는 아침 행사인데도, 매번 5분 늦게 일어나 맞는 지각 행사다.
젖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여자의 샴푸 냄새가 가을바람에 실려 코끝을 간질인다. 잠시 여유로운 생각에 잠길 즈음, 아차! 지갑!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은 왜 그리도 먼지.
느지막이 차에 올라 자리라도 있으면 눈꺼풀은 천근만근. 지난 밤 피곤함을 뒤로 하고 단잠에 빠지다보면 정류장을 지나치기 일쑤다. 이럴 때 마다 누군가의 손마디가 그립다. 어깨를 두어 번 흔들어 깨워주면 얼마나 좋을까. 시린 손마디라도 좋은데.
넓디넓은 서울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출퇴근길 ‘환승’은 필수 조건이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다시 지하철에서 버스로. 두세 번 거치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몸도 익숙해졌는지 눈 감고도 걸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 다소 먼 거리를 앉아 갈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 손잡이를 기둥삼아 몸을 지탱한다.
무료로 나눠주는 지하철 일간지는 긴 나무토막을 짧게 보이도록 하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 그것이 무슨 ‘무기’라도 되는 양, 도시인들은 모두들 그것을 들고 아침 마실을 나간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그것으로 때려잡을 기세로.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신문을 잽싸게 가로채는 날쌘 남학생의 행동에 기운이 빠진다.
2.
다행히 자리가 났다. 그런데 앉아보니 오른편에 앉은 남자의 다리가 너무 벌어져 있다. 왼편의 아주머니는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앞에 서 있는 아가씨의 옷매무새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으며 ‘평가’하는 듯 하다. 오른편 남자 때문에 다리를 오므리고 갈 수 밖에 없다. 불편하다. 한 마디 할까. 곤히 자고 있는 걸 깨울 수 없어 참는다.
원하지 않는 ‘압박감’으로 인해 오히려 포근했던 것일까. 잠에서 깨니 못 보던 지하철 정류장이다. 문이 닫힌다. 오른편의 남자도, 왼편의 아주머니도 없다. 지하철은 나 혼자 뿐이다. 종점이다.
친절한 성우의 멘트로 종점을 알리는 지하철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도시인들의 ‘무기’를 걷어내는 껌씹는 아주머니들뿐이다.
3.
다행히 아무도 없다. 문 옆에 조그만 책상에 앉은 여직원만 조용히 웃으며 날 맞는다. 굿모닝이라는 말과 함께.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에 눌려 고개를 숙이니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모두들 회의에 집중하고 있다.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칼진 음성이 사무실의 벽을 타고 귀를 때린다. 순간 움찔. 멈춰선 걸음. 너 지금 몇 신 줄 알아? 여기가 놀이터야? 지난 밤 새벽 1시까지 근무한 업적(?) 온데간데없다. 원래 이렇다. 본디 그렇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위안이 된다. 나 혼자만 이렇다면 억울할 텐데. 어쩔 수 없는 근무환경, 바꿀 수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건만 떠나지 못한다. 이것 또한 누구나 그러하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과감히 사표를 제출하고 캐나다 유학길에 오른 김 대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가 사표를 제출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드라마다. 각본 없는 드라마. 그 순간에 대해 한일전에서 2:0으로 지고 있다가 3:2로 역전승 했을 때보다도 통쾌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 혈혈단신으로 마음가짐이 홀가분했을 지도 모른다. 도피성 유학은 아닐 터. 평소 10년 후의 일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거품 물고 자신의 계획을 주장하던 그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떠나고 난 후, 업무는 더욱 가중됐고 주말도 사라졌다. 한 번은 어느 날 아침 이를 닦으며 TV를 볼 요량으로 소파에 앉은 적이 있다. 이를 닦기 시작 한 지, 이미 20초가 더 흘렀을 무렵이다. TV에서는 평소 보지 못했던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아차, 오늘 일요일이구나. 닦던 이를 버리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자니 억울했다. 일찍 일어난 것이 억울하고 정신 차리고 이를 닦았던 나의 뇌세포들에게 미안했다.
내 자리에 앉아 PC를 켜고 잠시 기다리니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그림이 눈을 사로잡는다. 알퐁소 도데의 ‘별’에 나왔음직한 그 언덕과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목동의 어깨에 기댔던 그 밤의 별빛이 키보드 위로 쏟아지는 듯 하다. 부팅 되며 내는 빛에 이런 생각이 들다니, 내가 갈 곳은 결국 그 곳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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