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S] 정글을 삼킨 독사, 마이클 조던
NBA 올스타전이 열리는 2월을 맞아 지난 2003년 자신의 마지막 올스타전에서 잊지 못할 감동을 전한 조던의 성공 스토리를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했던 대학 및 NBA 첫 우승 시기를 중심으로 재조명한다.
ⓒ AFP/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그해 미대학농구 NCAA 파이널. 경기 종료 32초를 남기고 61-62로 조지타운에 뒤져있던 노스 캐롤라이나의 딘 스미스 감독은 작전타임을 걸었다. 누가 봐도 당시 28점을 올린 제임스 워시와 샘 퍼킨스에게 마지막 샷 기회가 돌아갈 분위기였다. 작전 시간이 끝날 무렵 스미스 감독은 팀 내 '넘버 3'로 1학년에 불과한 조던에게 부드러운면서도 단호하게 명령했다. "조던, 네가 끝내라". 당시 스미스 감독은 워시나 퍼킨스가 상대로 부터 집중 견제를 받을 게 뻔해 조던에게 팀 운명을 맡겼다.
포인트 가드인 지미 블랙으로부터 패스를 받은 뒤 다시 공을 주고 받은 조던은 샷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상대 수비수가 바짝 달라붙어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블랙 - 맷 도허티- 블랙으로 이어진 공이 잠시 수비수로부터 자유로워진 본인에게 돌아오자 망설임 없이 자칭 '무지개' 샷을 자신있게 쏘아 올렸고 루이지아나 수퍼돔 코트 위로 솟아오른 그 샷은 종료 15초를 남긴 채 정확히 림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63-62로 앞선 노스 캐롤라이나는 마지막 반격에 나선 조지타운의 가드 프레드 브라운의 어처구니 없는 턴오버로 정상에 올랐고 역전샷의 주인공 조던은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음했다.
1983년(좌), 1991년(우) SportsIllustrated 커버를 장식했던 마이클 조던 <출처 : SportsIllustrated 홈페이지> |
이밖에도 조던은 5번의 NBA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및 6번의 파이널 MVP 그리고 14번의 올스타전 출장과 함께 3번의 올스타전 MVP를 차지했다. 또 10번의 정규시즌 득점왕에 오르는 등 숱한 개인상을 휩쓸었다. 은퇴를 앞둔 2002∼2003시즌까지 경기당 평균 30.1득점, 마지막 시즌을 제외한 2001∼2002시즌까지 평균 22.7에서 37.1득점하는 변치 않는 모습을 보여 수퍼스타로서의 절대 기준인 꾸준함을 잃지 않았다.
조던의 시카고 불스는 1997년 NBA 파이널에서 유타 재즈를 꺾고 챔피언에 등극했다 ⓒ AFP/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타고난 승부사 기질과 재능을 지녔다고 해서 쉽게 성공할 순 없는 법. 조던 역시 다르지 않아 집념과 열정을 발산하며 시련을 극복한 뒤 활짝 웃었다. 잘 알려진 대로 조던은 고교 시절 대표팀 탈락 수모를 겪는 등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대학 진학을 1년 앞두고는 전미 고교 유망주 300위 내에도 들지 못했다. 다른 유망주들은 일찌감치 대학 스카우트의 표적 대상이었지만 조던은 예외였다. 유난히 자존심과 승부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조던에게는 참기 힘든 과정이었다.
대학 진학도 순탄치 못했다. 조던은 어린 시절부터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 출신으로서 지난 1976년 처음으로 선보인 슬램덩크 대회(ABA) 결승에서 줄리어스 어빙과 대결했던 데이비드 톰슨(준우승)을 동경해왔다. 자연스럽게 조던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를 목표로 세웠다. 하지만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는 코치진 변화에 더 신경쓰느라 조던 영입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던은 '신동'으로 불렸던 랄프 샘슨과 같이 뛰고 싶어 버지니아를 지원했다. 매릴랜드에도 기웃거렸다. 돌아온 건 싸늘한 반응 뿐이었다. 선택폭이 좁아진 조던은 결국 탐탁치 않게 여겼던 노스 캐롤라이나로 향했다.
조던은 자존심에 무척이나 민감했던 이 시기에 큰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조던은 주변의 관심 부족을 전화위복의 기회를 삼을 만큼 야무졌고 독했다. 자존심 회복을 위해 훈련에 더 매진했고 끊임없는 훈련은 더욱 그의 일상이 되버렸다. 한번 집중하면 자기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할 줄 아는 조던은 이후 노력하는 선수로 변모했다. 아울러 관심을 덜 받게 되면서 스타 의식에 사로 잡히지 않은 채 모범 선수로 성장했다. 운동 좀 한다고 학업에 소홀하거나 무모한 행동을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다.
스코티 피펜, 필 잭슨, 그리고 마이클 조던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대학에서 한껏 주가를 올린 조던은 1984년 6월 NBA 신인 드래프트 전체 3번으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됐다.(불스는 공교롭게도 조던 출생연도와 같은 1963년에 탄생했으며 3년 뒤인 1966년 리그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고 참가했다) 불스와 묘한 인연을 맺은 조던은 처음부터 시련에 부딪혔다. 사회는 학교와 달랐으며 학창 시절 겪었던 자존심 상처는 프로 진출 후 겪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시카고는 조던이 합류하기 전인 지난 3년 동안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으며 헤드코치 교체도 같은 기간 5번이나 이뤄지는 등 최악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실력도 형편없었지만 팀 분위기 마저 최악이었다. 당시 NBA는 마약 스캔들 때문에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1980년 LA 타임즈가 NBA 선수 가운데 40∼75%가 코카인 흡입을 한다고 밝혀 큰 파문을 일으킨 것. 이에 따라 그 해 파이널은 매직 존슨과 카림 압둘 자바의 LA 레이커스 대 줄리어스 어빙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라는 빅매치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별 뉴스에 밀려 라이브가 아닌 테이프 지연 방송으로 중계되기도 했다.
1998년 2월 1일 조던의 시카고 불스와 코비의 LA 레이커스의 대결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팀 내 갈등은 계속 됐다. 제리 크라우스 단장과의 신경전이다. 조던은 1985∼86시즌 첫 3번째 경기 만에 왼발 부상을 당해 64경기를 결장하게 됐는데 이때 조던을 시즌 결장시키려는 프론트와 갈등을 빚었다. 조던은 팀이 자신의 복귀를 한사코 만류한 이유는 전력 약화를 틈타 이듬해 신인 드래프트 상위 지명권 기회를 얻기 위함이라고 대놓고 비난했다. 1988∼89시즌을 앞두고는 절친한 동료인 찰스 오클리를 내보내고 빌 카트라이트를 영입한 트레이드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조던은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의욕 넘치는 신인 답게 아니 본인의 일상 그대로 훈련에 매진했고 경기에서도 승부욕을 불태웠다. 상대방을 자극하는 특유의 언행도 여전했다. 입단 첫 해 팀 내 공격 부문을 대부분 차지하자 동료 빅맨들의 전유물인 리바운드까지도 넘보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 동료들의 분발을 이끌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모두가 조던에 호감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포워드였던 스티브 존슨 등 고참들은 "그래도 조던이 들어와 선수단에 긍정적인 마인드가 심어졌다"며 조던의 열정을 인정했다.
어쨌거나 조던은 첫 시즌에서 신인왕을 거머쥐는 등 팀 기대에 부응하며 시카고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또 부상 당한 2년차에도 프론트와 싸워 출전을 강행했고 경기 시간 제한 속에서도 팀 승리를 이끌면서 기여코 플레이오프 2년 연속 진출을 성공시켰다. 조던은 선수진 구성에 대한 불만도 정면돌파를 시도하며 풀어나갔다. 역시 까칠한 말투로 새로운 멤버들을 길들이면서 이들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2003년 조던의 마지막 올스타전. 케빈 가넷과 함께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가장 괴로웠던 건 경쟁자들이 우승컵을 차지했다는 점이었다. 조던은 1986년 4월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63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그가 목표로 하는 승리는 래리 버드의 몫이었다. 버드와 매직 존슨이 우승을 나눠가지는 사이 조던은 이들의 적수로 인정받지 못했다. 보스턴이 노쇠한 틈을 보이자 이번에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가 조던을 괴롭혔다. 토마스와 어과이어 등 '배드 보이즈'의 디트로이트는 '조던 룰'이라는 포위망을 설치해 조던의 우승 기회를 2차례나 가로채고는 2연패 기쁨을 누렸다.
우승 반지를 끼지 못해 2% 부족한 '넘버 1'에 머물렀던 조던은 주저앉지 않았다. 부족했던 야투성공률을 4년차인 1987∼88시즌에 5할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이듬해 시즌에는 전년 대비 100포인트 향상된 35%의 3점샷 성공률까지 기록, 체력 안배 조절과 함께 더욱 완벽한 공격수로 거듭났다. 자기 중심적인 플레이에 치중한다는 비난을 불식시키려 본인 한 시즌 최다 어시스트(650개)를 기록한 1988∼89시즌 막바지에는 포인트 가드로의 변신도 수행했다.(물론 우승 스트레스에 사로잡힌 덕 콜린스 헤드코치의 요구가 큰 이유였다) '한계'를 인정하기 거부하는 조던이 서서히 정상을 밟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시카고 전력 역시 팀 플레이를 중시하는 텍스 윈터스 코치의 트리플 포스트 공격과 존 바크 코치의 개인 기량에 기반을 둔 공격적인 수비가 절묘한 조화를 이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제 조던과 불스는 우승의 기쁨을 누리는 일만 남았다. 조던은 성장통을 마친 스코티 피펜,호레스 그랜트와 함께 마치 잘 훈련된 도베르만처럼 1990∼91시즌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에서 그토록 자신을 괴롭힌 디트로이트를 사냥했다. "시카고가 우리의 작전을 훔쳐 거칠게 몰아 부쳤으며 수비에선 죽기 살기로 달라붙었다"는 존 샐리(디트로이트)의 증언처럼 철저히 디트로이트식으로 응징했다. 그것도 4전 전승으로 완파했다.
2003년 4월 16일 마이클 조던의 현역 마지막 경기였던 필라델피아전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조던은 존슨 벽도 넘어섰다. 조던은 최종 파이널 1차전 승리 기회를 놓쳤지만 이후 내리 4연승하면서 마침내 NBA를 정복했다. 비로서 넘버 1으로 우뚝 선 조던은 그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몰랐으며 탄력을 받은 채 거침없이 달렸다. 조던은 3연패을 이끈 뒤 아버지의 죽음과 도박 파문 등 석연치 않은 이유로 코트를 떠났으나 한 시즌을 거르고는 코트로 컴백했다. 그리고는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던 동년배의 칼 말론에게 연거푸 패배를 안기는 등 3연패를 재연하면서 NBA를 또 삼켰다.
한편 조던은 코트 밖에서 더 크게 성공한 주인공이다. 프로 입문과 함께 당시 단체 종목 선수로는 드물게 나이키와 '에어 조던'이라는 파격적인 신발 및 의류 용품 계약을 맺고는 대박을 터뜨렸다. 그 시절 흑인이라는 핸디캡이 있었지만 명문대 출신에 교육을 착실히 받았으며 혼을 쏙 빼는 플레이와 준수한 용모 및 성실함을 갖춰 스포츠 마케팅계의 블루칩이 됐다. 그러나 조던은 코트 안팎에서 막대한 부와 명예를 누렸음에도 첫 흑인 메이저리거인 재키 로빈슨이나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는 다르게 리더로서의 역할에 소극적이여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에어 조던 신발로 인한 청소년들의 강도 행각과 흑인 소외 계층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2007년 PGA 투어 와코비아챔피언십 프로암대회에서 타이거 우즈와 함께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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