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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기형도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이 명민하면서도 고독한 시인의 떠난 지 벌써 이십여 년. 한 장의 유언과도 같은 이 시를 아프게 읽으며 우리는 한 젊은 시인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의 짧았던 밤은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와 함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시인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는 참 좋은 시들이 빼곡하다. 그 중에서 겨울이면 더 생각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 더.

내 유년 시절 바람의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바람의 집」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