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ibility/수필
나의 취미(2001)
불탄고구마
2009. 7. 21. 15:33
취미가 뭐예요?
선볼 때나 소개팅 나가서 가장 흔하게 쓰는 멘트 중의 하나가 바로 취미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한다. 내 취미를 밝히자면, 너무 여러개로 나열될까 싶어 심히 염려가 앞선다.
취미는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없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한 곳으로 묶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이기에 오늘은 나의 취미에 대해 몇 자 적어볼까 한다.
나란 인간의 취미를 밝히려면, 우선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세월의 강을 거스르지 않고 얘기가 되지 않는 게 조금 이상스럽게도 하지만 어디 이 얘기 뿐이랴!
초등학교 시절 내 취미는 '짬뽕'이었다. 최근 본 책 중의 정재환의 '자장면이 맞아요. 잠봉은?'이란 제목을 단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짬뽕은 일본어로 '여러가지를 섞은 것'이라고 했는데, 당시 물렁거리는 고무공을 냅따 손으로 후려갈기는 그런 놀이가 왜 짬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아이들이 그렇게 불렀고,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러왔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 없었다.
하여튼 손쉽게 야구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깊은 매력에 빠져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유일한 취미는 그것이었다. 때론 축구도 했지만, 좁은 골목에서 외야수를 넘어갈 때의 그 쾌감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수돗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공을 손에 잡으며 다리에 힘은 왜 그리 단단히 붙던지.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나의 취미는 TV 시청이 주류를 이뤘다. 학교와 집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차를 많이 타게 됐고(당시 지하철 3, 4호선 개통식에 내가 있었다), 친구와 저녁 늦게 까지 함께 놀 수 없었던 나는 자연스레 TV와 친해지게 됐다. 학업은 뒷전이고 집에 오면 최진실과 김혜수, 하희라의 미모에 빠져 지낸 날이 억수로 많았다.
이러한 나의 취미는 고스란히 고교 시절까지 올라가 기어코 AFKN을 시청하게끔 만들었다. 국내 방송에 싫증을 느꼈던 까닭일까. 그 덕분에 당시 나의 영어실력은 꽤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된다.(기억된다? 그렇다면 지금은? -_-;) 미프로레슬링의 매니아가 되고, 에어울프를 AFKN에서 원어로 듣고... 히어링은 대충 먹혀 들었다. 우리 때 부터 듣기평가가 시작됐으므로, 영어시험에서 7문제는 그대로 가져오는 셈이 됐다. 문법은 전혀 몰랐지만.
중학교 시절 얘기를 다시 해야 겠다. 중학교 1학년 때(당시 관악구 남현동 거주) 구반포에 위치한 남서울 교회란 곳을 다니게 됐다. 이 이야기를 풀자면 한나절은 걸리기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 교회를 나가게 됐다. (나의 종교에 대한 얘기도 나중에 하겠다)
당시 만난 친구. 이 자식들의 이름이 무엇이냐면, 김**, 유**, 이*, 한**(가나다순)다. -_-;;
지금도 둘도 없는 친구지만 당시 우리의 끈끈한 인연은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때 갔었던 교회 수련회때 시작됐다. 당시 내게 말을 건넸던 성익이의 음성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혼자 왔어요?"
아니다. 새꺄. 친구랑 왔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난... 어색함을 무릎쓰고 "아뇨. 친구랑 왔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시초가 되어 우리의 인연은 시작됐고, 내 인생의 획을 긋게 만든 취미가 있었으니, 바로 농구의 시작이었다. 마이클 조던이 86년 노스캐롤라이너 대학을 졸업하고 미NBA 드래프트 3위에 올랐던 것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의 농구는 형편없었기 때문에(또한 프로야구의 인기가 너무 컸기에) 미국 프로농구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이클 조던을 알았고, 그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더블클러치란 것을 낑낑거리며 해대기 시작했고, 3점슛을 남발하며 친구들에게 욕을 먹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나는 키165에 몸무게 68이었던 '이상한 체구'가 키175에 몸무게 65로 '이상적인 체구'로 변하게 됐다. 이러한 몸매의 변화는 고등학교 3학년에 절정을 이뤘지만, 당시 나의 체구에 대한 컴플렉스는 매우 심각했다. 여드름에 땅따리라니. 어느 소녀가 내게 눈길을 주겠는가!(이 이야기도 추후 밝히겠다)
나의 취미는 이렇게 시작됐다. 농구. 그 농구의 인생은 고교시절 반대항 대표로 선발되게 만들었고, 대학 시절 과대표로 뛸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지금은 가끔... 아주 가끔 한강변에서 뛰곤 하지만, 예전처럼 일요일 마다 예배 끝나고 하진 못한다. 그 덕에 똥배도 무척 보기 좋게 됐지만.
20세를 넘기며, 세상에 눈을 뜨며,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의 취미는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21세때 여자에 눈을 뜨며, 사랑을 알고, 미움을 알고, 술을 알게 되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갔다. 잠깐이었지만 나이트를 취미로 삼았던 때도 그 때였으며 양아치라 불릴 만한 행동들도 그 때 내 유일한 취미 생활이 됐었다.
지금은 우습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생의 낙이었을 정도였다. 담배도 배우고, 술과 여자. 뭔가 고독하고 음흉한 향내를 풍기는 이런 취미는 26세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술과 담배를 알게 되면서 글을 알게 됐고, 사랑을 알게 되면서 시를 느끼게 됐다. 군대에 입대해 몇 개월 거치면서 나의 고독을 진심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됐던 것이다.
그 와중에 '여행'이란 것이 스며들었다. 여행.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위에 언급한 놈들과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갔던 것이 바로 나의 첫 여행이다. 수학 여행이 처음이라고 우기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나의 첫 여행은 어디까지나 그것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아직도 난 우긴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고.
여행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나이를 먹어가면서 때로는 예기치 않게, 때로는 철저한 계획아래 여행을 다니게 됐다. 26세 때 '문학기행반'이란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나의 여행은 피치를 올리게 된다.
기껏해야 한 여름, 바다를 찾았던 것이 전부였던 내게 문학기행반은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라도를 시작으로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남해, 서해, 동해의 바닷 바람은 모두 맞아봤고, 밤새 달려 새벽녁에 호미곶에 도착한 날도 있었다. 그 때의 그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말로 설명 못한다. 아마도 내 자신을 되돌아 보게 만든 최초의 시간이었고, 스스럼없는 사람들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만든 것도 여행이었다. 천리안에서의 여행도 기억에 남는다.
나의 통신 생활은 1997년 2월, 하이텔로 부터 시작됐다. 추후 또 밝히겠지만, 98년 3월 천리안으로 옮기면서 여행을 무척 많이 가게 됐다.
여행 못지 않은 나의 취미 생활 중 하나가 바로 영화 감상과 음악 감상이다.
영화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조조 할인을 받아보기도 했으며, 혼자 보는 것도 무척 어색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고교 시절이었다.
내가 본 최초의 극장 영화는 바로 ET. 그 충격으로 영화는 내 인생이 됐다. 고교시절 연극영화과에 가려고 했던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다. 고교 시절 짝꿍은 당시 나와 무척 많은 영화를 함께 봤다. 그 친구는 지금도 영화판에서 잘나가고 있지만, 나란 놈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음악은 영화 못지 않은 나의 취미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것이 기타에 국한되지만, 중학교 시절 이미 변진섭 1집을 구입하며 음악에 심취하게 됐다. 지금은 옴니버스 앨범이라 하여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당시에는 종이에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적어 레코드샵에 가서 주인장에게 "이거 녹음해 주세요"하며 4000원을 내밀면 나만의 테이프를 완성시켜 줬다.
당시 4000원은 매우 큰 액수였다. 정품 테이프와 비슷한 가격이었으니. 그래도, 나만의 테이프를 만들었고, 그 테이프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잘 듣진 않지만, 당시 들었던 노래들을 최근 MP3로 다운받아 CD로 재제작을 하고 있다. 훗.
친구의 생일에는 직접 테이프에 곡을 녹음시켜 선물했다. LP를 조금 수집했고, 왠만한 테이프는 내 손에 쥐어졌다. 듣고 싶은 음악은 기필코 구입해야마는 성격이었다.
그 덕에 당시 나는 꽤 많은 음악을 섭렵했고, 팝송도 꽤 듣게 됐다. 지금은 '자전거를 탄 풍경'이라는 그룹의 리더로 자리매김한 봉주형(송봉주:나의 큰 이모 아들)은 당시 내게 큰 형처럼 느껴질 만큼 기타를 잘 튕겼다.
팝과 발라드를 좋아했던 나는 20세때 서태지와 듀스에 심취하게 했고, 나이트를 들락거리며 춤을 알게 되면서 터보와 룰라를 좋아했다. 군대를 입대하면서 김광석과 안치환을 알게 됐고, 이 후 나의 노래는 거의 포크송이 주류를 이루게 됐다.
이렇듯, 나의 취미는 농구, 여행, 영화, 음악. 이렇게 4가지로 요약된다. 간간히 몇몇의 취미 생활이 있긴 했지만 굵지 않기에 무시하기로 하겠다.
향후 어떠한 것이 나의 취미 생활에 끼여들 진 모르지만, 현재로선 이렇다. 취미 생활을 많이 영위하지 못하는 요즘, 퍽 그 때가 그립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고프다. 취미 생활의 시간이 많아지면 그 만큼 여유롭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정신적 여유로움과 육체적 여유로움의 조화는 여전히 힘들기만 한가?
훗~~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련다.
선볼 때나 소개팅 나가서 가장 흔하게 쓰는 멘트 중의 하나가 바로 취미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한다. 내 취미를 밝히자면, 너무 여러개로 나열될까 싶어 심히 염려가 앞선다.
취미는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없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한 곳으로 묶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이기에 오늘은 나의 취미에 대해 몇 자 적어볼까 한다.
나란 인간의 취미를 밝히려면, 우선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세월의 강을 거스르지 않고 얘기가 되지 않는 게 조금 이상스럽게도 하지만 어디 이 얘기 뿐이랴!
초등학교 시절 내 취미는 '짬뽕'이었다. 최근 본 책 중의 정재환의 '자장면이 맞아요. 잠봉은?'이란 제목을 단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짬뽕은 일본어로 '여러가지를 섞은 것'이라고 했는데, 당시 물렁거리는 고무공을 냅따 손으로 후려갈기는 그런 놀이가 왜 짬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아이들이 그렇게 불렀고,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러왔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 없었다.
하여튼 손쉽게 야구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깊은 매력에 빠져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유일한 취미는 그것이었다. 때론 축구도 했지만, 좁은 골목에서 외야수를 넘어갈 때의 그 쾌감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수돗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공을 손에 잡으며 다리에 힘은 왜 그리 단단히 붙던지.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나의 취미는 TV 시청이 주류를 이뤘다. 학교와 집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차를 많이 타게 됐고(당시 지하철 3, 4호선 개통식에 내가 있었다), 친구와 저녁 늦게 까지 함께 놀 수 없었던 나는 자연스레 TV와 친해지게 됐다. 학업은 뒷전이고 집에 오면 최진실과 김혜수, 하희라의 미모에 빠져 지낸 날이 억수로 많았다.
이러한 나의 취미는 고스란히 고교 시절까지 올라가 기어코 AFKN을 시청하게끔 만들었다. 국내 방송에 싫증을 느꼈던 까닭일까. 그 덕분에 당시 나의 영어실력은 꽤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된다.(기억된다? 그렇다면 지금은? -_-;) 미프로레슬링의 매니아가 되고, 에어울프를 AFKN에서 원어로 듣고... 히어링은 대충 먹혀 들었다. 우리 때 부터 듣기평가가 시작됐으므로, 영어시험에서 7문제는 그대로 가져오는 셈이 됐다. 문법은 전혀 몰랐지만.
중학교 시절 얘기를 다시 해야 겠다. 중학교 1학년 때(당시 관악구 남현동 거주) 구반포에 위치한 남서울 교회란 곳을 다니게 됐다. 이 이야기를 풀자면 한나절은 걸리기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 교회를 나가게 됐다. (나의 종교에 대한 얘기도 나중에 하겠다)
당시 만난 친구. 이 자식들의 이름이 무엇이냐면, 김**, 유**, 이*, 한**(가나다순)다. -_-;;
지금도 둘도 없는 친구지만 당시 우리의 끈끈한 인연은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때 갔었던 교회 수련회때 시작됐다. 당시 내게 말을 건넸던 성익이의 음성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혼자 왔어요?"
아니다. 새꺄. 친구랑 왔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난... 어색함을 무릎쓰고 "아뇨. 친구랑 왔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시초가 되어 우리의 인연은 시작됐고, 내 인생의 획을 긋게 만든 취미가 있었으니, 바로 농구의 시작이었다. 마이클 조던이 86년 노스캐롤라이너 대학을 졸업하고 미NBA 드래프트 3위에 올랐던 것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의 농구는 형편없었기 때문에(또한 프로야구의 인기가 너무 컸기에) 미국 프로농구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이클 조던을 알았고, 그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더블클러치란 것을 낑낑거리며 해대기 시작했고, 3점슛을 남발하며 친구들에게 욕을 먹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나는 키165에 몸무게 68이었던 '이상한 체구'가 키175에 몸무게 65로 '이상적인 체구'로 변하게 됐다. 이러한 몸매의 변화는 고등학교 3학년에 절정을 이뤘지만, 당시 나의 체구에 대한 컴플렉스는 매우 심각했다. 여드름에 땅따리라니. 어느 소녀가 내게 눈길을 주겠는가!(이 이야기도 추후 밝히겠다)
나의 취미는 이렇게 시작됐다. 농구. 그 농구의 인생은 고교시절 반대항 대표로 선발되게 만들었고, 대학 시절 과대표로 뛸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지금은 가끔... 아주 가끔 한강변에서 뛰곤 하지만, 예전처럼 일요일 마다 예배 끝나고 하진 못한다. 그 덕에 똥배도 무척 보기 좋게 됐지만.
20세를 넘기며, 세상에 눈을 뜨며,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의 취미는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21세때 여자에 눈을 뜨며, 사랑을 알고, 미움을 알고, 술을 알게 되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갔다. 잠깐이었지만 나이트를 취미로 삼았던 때도 그 때였으며 양아치라 불릴 만한 행동들도 그 때 내 유일한 취미 생활이 됐었다.
지금은 우습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생의 낙이었을 정도였다. 담배도 배우고, 술과 여자. 뭔가 고독하고 음흉한 향내를 풍기는 이런 취미는 26세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술과 담배를 알게 되면서 글을 알게 됐고, 사랑을 알게 되면서 시를 느끼게 됐다. 군대에 입대해 몇 개월 거치면서 나의 고독을 진심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됐던 것이다.
그 와중에 '여행'이란 것이 스며들었다. 여행.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위에 언급한 놈들과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갔던 것이 바로 나의 첫 여행이다. 수학 여행이 처음이라고 우기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나의 첫 여행은 어디까지나 그것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아직도 난 우긴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고.
여행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나이를 먹어가면서 때로는 예기치 않게, 때로는 철저한 계획아래 여행을 다니게 됐다. 26세 때 '문학기행반'이란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나의 여행은 피치를 올리게 된다.
기껏해야 한 여름, 바다를 찾았던 것이 전부였던 내게 문학기행반은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라도를 시작으로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남해, 서해, 동해의 바닷 바람은 모두 맞아봤고, 밤새 달려 새벽녁에 호미곶에 도착한 날도 있었다. 그 때의 그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말로 설명 못한다. 아마도 내 자신을 되돌아 보게 만든 최초의 시간이었고, 스스럼없는 사람들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만든 것도 여행이었다. 천리안에서의 여행도 기억에 남는다.
나의 통신 생활은 1997년 2월, 하이텔로 부터 시작됐다. 추후 또 밝히겠지만, 98년 3월 천리안으로 옮기면서 여행을 무척 많이 가게 됐다.
여행 못지 않은 나의 취미 생활 중 하나가 바로 영화 감상과 음악 감상이다.
영화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조조 할인을 받아보기도 했으며, 혼자 보는 것도 무척 어색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고교 시절이었다.
내가 본 최초의 극장 영화는 바로 ET. 그 충격으로 영화는 내 인생이 됐다. 고교시절 연극영화과에 가려고 했던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다. 고교 시절 짝꿍은 당시 나와 무척 많은 영화를 함께 봤다. 그 친구는 지금도 영화판에서 잘나가고 있지만, 나란 놈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음악은 영화 못지 않은 나의 취미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것이 기타에 국한되지만, 중학교 시절 이미 변진섭 1집을 구입하며 음악에 심취하게 됐다. 지금은 옴니버스 앨범이라 하여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당시에는 종이에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적어 레코드샵에 가서 주인장에게 "이거 녹음해 주세요"하며 4000원을 내밀면 나만의 테이프를 완성시켜 줬다.
당시 4000원은 매우 큰 액수였다. 정품 테이프와 비슷한 가격이었으니. 그래도, 나만의 테이프를 만들었고, 그 테이프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잘 듣진 않지만, 당시 들었던 노래들을 최근 MP3로 다운받아 CD로 재제작을 하고 있다. 훗.
친구의 생일에는 직접 테이프에 곡을 녹음시켜 선물했다. LP를 조금 수집했고, 왠만한 테이프는 내 손에 쥐어졌다. 듣고 싶은 음악은 기필코 구입해야마는 성격이었다.
그 덕에 당시 나는 꽤 많은 음악을 섭렵했고, 팝송도 꽤 듣게 됐다. 지금은 '자전거를 탄 풍경'이라는 그룹의 리더로 자리매김한 봉주형(송봉주:나의 큰 이모 아들)은 당시 내게 큰 형처럼 느껴질 만큼 기타를 잘 튕겼다.
팝과 발라드를 좋아했던 나는 20세때 서태지와 듀스에 심취하게 했고, 나이트를 들락거리며 춤을 알게 되면서 터보와 룰라를 좋아했다. 군대를 입대하면서 김광석과 안치환을 알게 됐고, 이 후 나의 노래는 거의 포크송이 주류를 이루게 됐다.
이렇듯, 나의 취미는 농구, 여행, 영화, 음악. 이렇게 4가지로 요약된다. 간간히 몇몇의 취미 생활이 있긴 했지만 굵지 않기에 무시하기로 하겠다.
향후 어떠한 것이 나의 취미 생활에 끼여들 진 모르지만, 현재로선 이렇다. 취미 생활을 많이 영위하지 못하는 요즘, 퍽 그 때가 그립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고프다. 취미 생활의 시간이 많아지면 그 만큼 여유롭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정신적 여유로움과 육체적 여유로움의 조화는 여전히 힘들기만 한가?
훗~~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련다.
2001.9
그로부터 8년 후 지금,
나의 취미는 사진이 추가 됐고, 독서와 컴퓨터 게임이 일상화 되어 버려 취미 생활은 더 늘어난 셈이 됐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길 때도 있었고, 스노우보드에 미친 적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 골프채를 아직 잡진 않았지만, 친구들은 성화다.
그러나 농구, 여행, 영화, 음악... 이 네 가지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뭔 놈의 취미가 이리 많은 진 모르겠지만... 잠시라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