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고구마 2009. 7. 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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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도시.
재혁이 어린 시절 담배연기 자욱한 삼류영화관에서 눈을 비비며 보았던 그 영화. 그 영화속에 나왔는지 아니면 다른 책에서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날씨가 무던히도 흐린 날 서울역 고가에서 바라보는 서울역이 항상 재혁의 뇌리엔 남아있다. 그 우울함이란...
재혁은 어려서부터 그런 우울함을 지니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검정, 파랑, 빨강의 색을 섞어 놓은 그림을 그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께 무척이나 혼이나던 일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그런 재혁의 심정이 담겨있는 것일 듯. 검정, 파랑, 빨강의 색을 섞으면 무슨 색이 될까. 재혁은 그것이 궁금했을 뿐인데, 꽃병이 놓여진 교탁을 한번도 보지 않은 재혁이 선생에겐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 색을 가볍게 섞어놓은 듯한 날씨가 간혹 있다. 1년에 두어번. 그 날이 너무나 좋다. 자줏빛을 내기도 하며, 푸른 빛을 내기도 하며, 거무스름한 빛을 내기도 하는 그런 하늘이 되는 날엔 아무것도 못한다. 구름속으로 뭔가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음침함. 재혁은 그것을 사랑한다.
"재혁아... 사랑엔 여러 가지가 있어. 누나랑 너랑 이렇게 만나는 것도 아마 사랑일거야. 사랑... 그래. 사랑."
재혁은 생각한다.
"그래. 사랑. 네가 말하는 것이 무언진 몰라도 누난 그렇게 생각해. 난 널 사랑하는 거야."
재혁은 당시만 해도 섹스없는 사랑이 무슨 사랑이냐는 어투로 쏘아붙였었다. 프로이드가 말하기를, 애정과 에로티시즘이 만나야 진정한 사랑이 된다고 했거늘, 그런 플라톤? 아니 플라토닉러브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누나의 말에 재혁은 수긍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혁은 누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보기좋게 거절을 당한 듯 보였지만, 누나도 재혁을 사랑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 그것을 재혁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누난 유부녀였다. 남편이 있는 여자. 유부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던가?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세상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냐고. 대답은 이러하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재혁아. 이제 우리 그만 만나자... 누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 말을 들은 것은 누나를 만나고 난 후 석달이 지난 어느 날 이었다. 그 짧은 말에 재혁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 복잡한 심리를 말로 할 수 없다. 글로 할 수는 더더욱 없다.
다만, 재혁의 뇌리엔 빨강과 파랑과 검정을 섞어놓은 듯한 그 하늘. 자줏빛이기도 하고 푸른빛을 내기도 하며 거무스름한 그 빛의 하늘. 그것밖엔 생각나지 않았다.
편지를 좋아했던 재혁도 그 말은 하지 않았었다. 사랑한다는 그 말.
재혁은 어쩌면 그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 헤어지자... 두 말을 모두 듣고 싶었던 것일까.
재혁에게 힘이 드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재혁은 안다. 그것이 두렵다.

재혁은 고가에서 내려오며 담배를 물었다. 시계만이 움직이는 듯 하다. 시계. 친구들의 얼굴로 묻어난 시계가 재혁을 빤히 쳐다본다.
12시 49분.
오늘은 전혀 재혁이 좋아하는 날씨가 아니다. 눈을 감으면 빨강이 눈앞에 선한. 그런 날이다. 재혁은 다시 한번 배를 움켜쥔다. 배고픔일거야. 자위한다. 음식점을 찾는다. 빨간 글씨로 '중화요리'.
"짜장하나 주세요."
배아픔을 배고픔으로 착각하는 재혁이지만, 빨간글씨에 이끌려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주문부터 하는 습관은 아마 군시절에 생긴 습관일 것이다. 외출 혹은 외박을 나오면 으레 그것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엔. 그 시절? 그래. 그 시절이 뭐지? 다들 그 시절엔 그랬다는데, 도대체 그 시절이 뭐야?
재혁은 하마터면 소릴 지를 뻔 했다. 눈을 천장에 대고 그렇게 외칠뻔 했던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중국 음식점은 한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정확히 11시 방향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 그녀다. 맞다. 그녀다. 앞엔 남자가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볼까. 자리를 옮겼다. 그녀를 등지고 앉았다. 등지고 앉았지만, 궁금했다. 자세히 보고 싶었다. 벌써 4년. 어떻게 변했는지 그렇게도 궁금해했던 그녀인데. 재혁은 고개를 살며시 돌려보았다. 물을 마시며 메뉴판을 보는 여느 손님들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는 것 처럼.
그녀는 역시 변해 있었다. 굳이 외모를 얘기하라면, 머리는 짧아지고 살은 말랐다. 이 짧은 문장으로 그녀의 지난 4년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행복해 보였고. 한때는 나와 키스를 하며 섹스를 했던 그녀. 이젠 다른 남자 앞에서 눈웃음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재혁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인생은 그런가해서. 그녀가 조금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을 보며, 짜장묻은 입술을 혀로 핥아내는 모습을 보며, 재혁은 그녀와 했던 4번의 섹스를 기억해 낸다. 키스할 때의 그 혀. 그래. 저 혀가 내 혀와 같이 숨쉬었었는데 하며 고개를 돌린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짜장면을 앞에 두고 가만히 있다. 안경을 벗고, 눈을 한번 비비고 짜장을 비빈다. 짜장은 값이 싼 편이어서 그런건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그런건지 5분도 안되서 나왔다. 재혁이 그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5분. 그것 뿐이었다. 5분. 항상 극적인 순간은 짧아. 그래. 맞아. 재혁은 단무지를 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짜장면을 먹은 후에 담배한대는 기막히다. 술먹으며 태우는 담배보다 더한 느낌. 담배를 물며 그 빨간글씨집을 나선다. 그것을 알 사람은 안다. 담배갑을 보니 두 대 남았다. 길에 서 있다 보니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재혁의 옷깃을 간간히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는 아직 그 음식점에 남아있다. 빨간 글씨로 쓴 그 '중화요리' 집에.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