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ibility/詩

가을이 오면 - 1998.9.15

불탄고구마 2009. 6. 14. 17:22
산마루에 해가 걸려 있다.
지난 달보다 산의 유혹이 더 심해졌나 보다.
같은 시간에 해를 보니,
해는 산에게로 더 다가가 서 있었다.

뒷동산에 올라 그 유혹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부끄러워 하는 모습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해가
산의 등뒤에 숨어,
이내 길게 숨을 몰아쉰다.
그 숨을 다시 내가 들이킨다.
폐가 터져라 긴 호흡으로
검게 타들어가는
마지막 가을 하늘을 감상한다.

깊고 높게 뻗은 가지들을 뒤로 하고
돌아선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 귀뚜라미가
내게 묻는다.
아무 대답이 없다.
해가 산에게로 가고,
내가 해에게로 가서 그럴까.
왜 그리 슬프게 우는가.

산허리는 없어졌다.
부끄러워하는 해가 사라지고
이제 산허리는 없어졌다.
'산은 그래도 살아있을 거야.'
귀뚜라미가 말한다.
난 믿지 않는다.
까맣게 타버린 하늘은 다시 숨구멍을 튼다.
반짝이는 것이 무엇인가.

산이 없는데, 이제 반짝여도 소용없다.
숨을 쉰다면 허락한다.
반짝이는 것들이 죽었다 살았다 한다.
온통 가을의 향기로 범벅이 된 난,
오늘도 그 반짝임으로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살아야 함에 반짝인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1998. 9. 15. 「가을이 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