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folio/일반기사[2003~2007]
[SK그룹 03사번 동기들]“일 얘기 외에 무슨 할 얘기가 있지?”
불탄고구마
2009. 3. 10. 17:21
“일 얘기 외에 무슨 할 얘기가 있지?” “여자 있잖아. 여자. 크크”
돈과 시간은 반비례 ... 여가시간도 중요
‘일과 사랑’ 만들어가는 2년차 SK맨들
새해 첫달에 걸맞게 이번호 ‘한잔합시다’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03 사번들의 모임이다. 풋풋함의 상징인 신입사원의 티를 벗어내고 04 사번들을 맞이한 막내 아닌 막내들. 어떤 조직에서나 막내는 그 조직의 향기로운 꽃이고 힘차게 뻗어나갈 뿌리 같은 존재다.
SK건설 윤상권(29)씨, SK텔레콤 윤상준(28)씨, SK증권 이지훈(30)씨, SKC&C 최준원(30)씨 등 4명은 바람이 싸늘한 강남터미널 앞 광장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자를 맞이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분위기가 다소 다를 것이라 예감했던 탓에, 쉬운 인터뷰가 될 것이라 짐작했다. 아직 신세대라 일컬을 만한 나이테를 지녔고 학생과 직장인이라는 ‘교집합’ 한가운데 있을 듯 해 보였기 때문이다.
최준원씨가 다소 늦는다는 연락을 받고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도 ‘고깃집’이었다. 동창회 1차 코스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대포집. 그렇다고 1년만에 만난 사내들이 조용한 카페에서 차를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시끄러움을 감수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학생 시절, 갈비 한접시에 소주 3-4병을 마셨던 때를 기억하며, 새우깡에 막걸리만 있어도 즐거웠던 때를 회상하며, 그렇게 돼지고기 냄새 풀풀나는 대포집으로 그들은 기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힘도 좋으셔라.
지난해 1월 2일에 입사했으니 만 1년 된 신참들이다. 아니 후임을 맞은 입장에서 보면 신참이란 말이 꽤 귀에 거슬릴 터. 조직 생활을 해봤다면 ‘후임’에 대한 열망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단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슬슬 학생티를 벗고 직장인 생활에 걸맞는 대화를 해보고자 처음부터 ‘돈’이라고 쓰여진 이야기 뚜껑을 열었다. 이야기 뚜껑 안에 돼지고기가 맛깔스럽게 들어간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윤상권/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것 같더라. 형은 어때?(상권씨 옆에 지훈씨가 앉았다)
이지훈/ ...
할 말이 별로 없나 보다. 증권사의 특성상 매일 돈과 씨름해야 하는 직업이라 그런지 지훈씨는 술잔 부딪히고 나서 말문을 열었다.
이/ 증권에 대해 너희들이 잘 아는 진 모르지만, 증권사는 조금 각박함이 있어. 매일 상관이건 부하건 하루 성과를 체크하거든. 네트워크로 모두 체크할 수 있다는 얘기지. 상사가 부하보다 성과를 못냈을 때를 생각해봐. 암담하지. 그게 사회인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지훈씨는 취재 내내 말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핵심에 잡히는 말들이 많았으니, 막판에 내뱉은 그의 ‘명언’을 유심히 살펴보시라. 소주가 한잔씩 돌아갔을 때 준원씨가 입장했다. 보스같은 이미지로 “약간 멋쩍다”며 취재에 응하기 싫은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보는 사람 앞에서 뭔가 연출된 이미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 같아 두려웠으리라.
우스갯소리지만 시종 그들은 ‘아부성 발언이 하늘을 찌르네’ ‘이거 녹음시키면 안되요’ ‘그런말 하면 타격입을 걸’ 등등 신세대만의 특별한 멘트가 줄을 이었다. 뭔가 멋쩍은 분위기를 돋우고자, 기자가 질문을 이어갔다.
기자/ 자주 만나세요? 입사한 지 1년 밖에 안됐으니 자주 만날 수 있지 않아요?
최준원/ 아뇨. 처음 분과에서 헤어질 때만 해도 매달 만나자 그랬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지금까지 네 다섯번 봤나? 아마 그랬을 겁니다.
상권/ 처음에는 자주 만날 줄 알았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오늘 1년만에 처음 만나는 동기도 있으니까요. 이런 자리가 마련돼 만날 수 있으니 더욱 좋죠.
윤상준/ 이 자리는 근데 말야. 할 얘기는 하는 자리 아냐?
최/ 할 얘기는 해. 괜찮을 걸? 크크.
이들이 속했던 분과는 신입사원 연수에서 꼴등을 차지했더란다. 1등보다 더 추억이 많은 것이 꼴등 아니던가. 그래서 그들은 허울없이 말들을 이어나갔다. 주위가 시끄러워 그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내용을 주워담으니 오로지 ‘여자’와 ‘일’에 국한돼 있었다.
아~ 여자! 그렇다. 사내 넷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노대통령의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겠는가, 한나라당과 대선자금비리에 대한 속풀이를 하겠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총각들의 최대 키워드는 바로 ‘여자’였다. 처음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젓가락으로 고기만 튕기는 사람도 보였고,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는 사람도 있었는데, 주제가 여자로 넘어가니 참기름 바른 후라이팬처럼 맨들맨들하게 기름진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이지훈/ 니들 없어?
상권/ 형은 있어?
이지훈/ 크크...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상권/ 오호~ 있구만~
최/ 난 올해 결혼하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 직장 들어가니까 깨지고 못하게 됐지뭐.
상준/ 예전에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었는데 여자친구 사귀니깐 그런 게 싹 없어지더라고. 학창 시절에 직장인이 되면 여자 친구부터 사귀겠다는 꿈을 이뤄낸 셈이지. 비록 1년 지나서 이뤄진 것이지만 말야. 으하하하.
이/ 여자고 뭐고 난 빵구난 카드값 메꾸는거 급하다.
상권/ 난 아픔이 있었지. 더 이상 묻지마.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 우리 동기 중에 김모시기라고 있잖아. 갸가 아마 여자 많을 걸?
상준/ 정말야? 김모군에게 잘 보이면 되는 거네? 크크.
상권/ 난 길에서 한번 꼬셔봤는데, 그러더라고. 놀아주지 않으면 때릴 것 같았다고. 크크.
최/ 길에서 꼬셔? 보통 소개팅을 하는데... 아 결혼하고 싶다.
상준씨의 이상형은 탤런트 유민이고, 준원씨는 영화배우 손예진, 지훈씨는 리포터 서민정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연애 결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주제가 ‘여자’로 바뀌자 이야기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상준씨는 여자친구 생긴 이래 연예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했다. 이 때, 우리가 앉은 자리 건너편에 여자들만의 저녁식사 테이블에 대고 누군가 이렇게 조용히 외쳤다. “옆에 여자만 넷이다.”
상준/ 사랑이란 건 그런 것 같아. 상대방이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거 아냐?
최/ 그렇지. 생각을 공유하고 양보하면서 맞춰가는 거지.
상권/ 나이가 어린 여자들은 대체로 좀 집착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기도 해.
여자가 최대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나이. 그러나,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학창 시절이 그리울 수도 있을 텐데... “학창생활이 그립지 않냐”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최/ 방학이 정말 그리워. 그립지 않아?
상권/ 그리워 죽지. 학생 때는 직장인 되고 싶었는데 말야.
상준/ 정말 주말에는 일 때문에 잠을 못잘 때가 많어.
최/ 오호~ 이거 너무 심한거 아냐? 이거 취재한다고 아부성 멘트로 너무 가는거 아냐? 하하하
상권/ 오호~ 진짜? 이거 녹음된다고 이럴 수 있는 거야? 하하하
상준/ 아니. 진짜 일요일 저녁에 그런 기분이 들더라니까.
이/ 혹시 평소에는 잘 자고 주말에만 못자는 거 아냐? 크크. (모두들 웃음보가 터진다.)
상준/ 그래도 주위에서 ‘요즘 뭐하냐’고 물을 때, 자랑스럽게 ‘저 SK 다녀요’할 때 가장 자랑스럽지 않아?
최/ 맞아. 그렇긴 해. 그래도 직장 생활에 있어 규율이라는 것이 못느끼던 것이라 그런지 때때로 답답하기도 해. SK의 이미지가 깨끗하고 세련됐다는 이미지가 직장생활에서 느끼는 비애같은 것들을 대체로 덮어주긴 하지만 말야.
상권/ 난 기술직으로 입사해서 다른 계열사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항상 현장에 있다 보니 여자 구경 좀 했으면 좋겠어. 크크. 우린 아침 6시반까지 출근이야.
이/ 와우. 난 할 말 없네. 나도 일찍 출근한다고 여겼는데 말이지.
술잔이 모두 다섯 번 이상 돌아간 듯 하다. 어림잡아 각자 1병 남짓 마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지훈씨는 이미 얼굴이 빨개져 있다. 덩치가 있어 보이는 상권씨는 술을 잘할 것 같았다. 기자가 사진을 찍는 사이 자기들끼리 수군댄다.
“이거 잘 찍힐까?크크” “표정관리 좀 해” “그게 뭐야. 나처럼 해봐” “괜히 웃는 척도 좀 하고” “즐거운 표정을 지으라니깐.흐흐” “이거 윗분들도 보시는 거라며”
상권/ 패기 알지? SK의 패기 세 가지.(상권씨가 SK 패기 세 가지에 대해 줄줄 읊었다. 이 때 모두 환호성이 터졌다)
이/ 오호. 대단한데. 난 처음 들었어. 크크
기자가 유치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SK에 입사해서 좋은 점은 뭔지에 대해. 그러나, 어쩌면 윗분(?)들이 궁금해 하는 점일 지도 모르는 질문이다.
상준/ 실무자의 의견을 많이 반영된다는 거죠. H모사나 L모사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해요.
상권/ S모사와 비교하면 이거 안될 테지만, 우리 회사만의 분위기가 있어요. 개개인의 능력을 매우 중요시 여겨주는 것이 좋죠.
최/ 예를 들어 하나의 주제를 놓고 볼 때, S모사는 ‘꼭 해와라’는 주문을 던지는데, 우리 회사는 일단 가능성을 타진한 후에 일에 임한다는 게 차이죠. 복장도 우리 회사가 제일 먼저 자유롭게 풀었잖아요. 창의적인 면을 매우 존중해주는 것 같아요.
상준/ 어떻게 보면 정글과도 같기도 해요. 1년차 때부터 바로 현장에 투입되니까. 그래서 인턴 생활을 겪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SK 뿐만 아니라 어떠한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인턴 생활을 하는 게 큰 도움이 되는 듯 합니다.
이/ 입사하고 나서 이 사회가 정말 경쟁 사회이고 ‘치열하구나’를 느껴요.
상권/ 맞아. 치열해.(다소 씁쓸한지 이 때 술잔이 한번 오간다)
술기운이 온 몸에 퍼지고 이야기가 무거웠는지, 누군가 별명을 부르는 듯 했다. “터미네이터”라는 상권씨의 별명은 분과회 시절, 팀장이어서 지어진 별명이란다. 지훈씨는 생김새를 보고 ‘김진수’라고 했고, 상준씨는 ‘청담동 호루라기’, 준원씨는 ‘푸우’라 했다. 모두 생김새에서 따온 듯 한데, 정말 비슷했다.(사진 참고)
이/ 저는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비군 훈련처럼 말예요. 동기들과 1년에 한번씩 3박 4일 정도 합숙하는 거. 어때?
별명 이야기 하다 말고 갑자기 지훈씨는 예비군 훈련이 그리웠는지 이러한 얘길 꺼냈다. 좋은 발상이다. 그러나, 이뤄질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만큼 직장 생활 1년 동안 학창시절 동문들, 그리고 직장 새내기 동기들과의 편안함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혹, 이러한 자리를 맞다보니 무의식중 가슴 속 깊은 곳에서 情이 꿈틀대며 ‘살아있음’을 증명시키려고 내뱉은 것인지도.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맛좋은 김치찌개에 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한 숟가락 입에 넣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서로 숟가락 들고 술잔을 돌리니 이야기 또한 처음 그 주제로 돌아갔다.
최/ 돈과 시간은 반비례하는 것 같아.
상권/ 난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여가 생활인 것 같아. 하도 스노우보드를 좋아해서 야간에 무주까지 갔다가 새벽에 올라와 출근하고 그런다니깐.
(다들 대단하다는 눈치로 쳐다본다.)
상준/ 지금은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고, 학창 시절엔 시간은 많은데 돈은 없고... 뭐 그런거 아닌가? 여가가 참 중요하지.
아르바이트로 사회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생활 1년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들은 이제 2년차다. 새로운 희망의 언저리에서 SK를 짊어질 미래의 주역들이다. 후임 SK맨들을 다그치고 선임 SK맨들에게 충성을 다하며 2004년을 살아가는 그들은 ‘꿈 많은 젊은이’다. 상준씨는 “자기 분야의 최고가 되고 싶다”고 했다. 상권씨는 “영업직을 경험해 보고 싶다”고 했다. 준원씨는 “현재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한 성과가 조금 보였으면 좋겠다”는 조그마한 포부를 밝혔다.
그렇다면 지훈씨는 어떠한 포부와 꿈을 갖고 살아갈까. 이때 박장대소한 말을 던졌으니, 바로 “SK에 이름 석자를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난리가 났다. ‘아부성 발언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식의.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했다. 지훈씨의 이름이 새겨지지 말란 법 없다. 부디 그들이 뿌린 오늘의 미소가, 그들이 나눈 오늘의 情이, SK의 초석이 되어 먼 훗날 길고 깊게 새겨지길 기대한다.
# 에필로그 - 무협 활극의 예비 주인공 4인방
윤상권씨는 새내기 시절 자신의 키를 비유해 농구선수로 동기들을 속였다 한다. SK 나이츠에서 방출돼 그룹으로 오게 됐다고. 우스갯 소리지만 다들 믿었다고 한다. 키가 마이클 조던 보다 1cm 모자란 196cm다. 보통 버스를 타도 뒤로 들어가기 힘들 만 하다. 운동을 좋아할 만 하다. 보드 매니아라 일컫는 상권씨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확고함이 있어 당차 보이기까지 했다.
상권씨 뿐만 아니라 모두들 현재 경제 난국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어 그런지, 4인방의 만남은 시종 유쾌했다. 무협 활극과도 같은 정치판과 경제판의 소용돌이와는 다소 거리가 먼 주제를 택해 이야기를 나눴던 탓인지도 모르나, 직장 생활 1년 차에 느끼는 것들은 인생 선배들도 잘 알듯이 어려울 것이 없는 시기다.
무조건 당차고 겪어보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에 벅차 있던 때다. 뭐든 될 것 같았고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때. 그 가운데 ‘희망’은 하루를 버티는 버팀목이었다. 꿈이 사라져 버린 지 이미 오래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창 밖의 무협 활극 때문에 머리가 팽팽 돌 지경인 사람이 있다면, 풋풋함이 묻어나던 그 때를 기억하자. 새내기 시절 돈에 얽매이지 않고 주머니에 만원만 있어도 즐거운 술자리에 낄 수 있었던 그 때를 말이다.
돈과 시간은 반비례 ... 여가시간도 중요
‘일과 사랑’ 만들어가는 2년차 SK맨들
새해 첫달에 걸맞게 이번호 ‘한잔합시다’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03 사번들의 모임이다. 풋풋함의 상징인 신입사원의 티를 벗어내고 04 사번들을 맞이한 막내 아닌 막내들. 어떤 조직에서나 막내는 그 조직의 향기로운 꽃이고 힘차게 뻗어나갈 뿌리 같은 존재다.
SK건설 윤상권(29)씨, SK텔레콤 윤상준(28)씨, SK증권 이지훈(30)씨, SKC&C 최준원(30)씨 등 4명은 바람이 싸늘한 강남터미널 앞 광장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자를 맞이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분위기가 다소 다를 것이라 예감했던 탓에, 쉬운 인터뷰가 될 것이라 짐작했다. 아직 신세대라 일컬을 만한 나이테를 지녔고 학생과 직장인이라는 ‘교집합’ 한가운데 있을 듯 해 보였기 때문이다.
최준원씨가 다소 늦는다는 연락을 받고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도 ‘고깃집’이었다. 동창회 1차 코스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대포집. 그렇다고 1년만에 만난 사내들이 조용한 카페에서 차를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시끄러움을 감수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학생 시절, 갈비 한접시에 소주 3-4병을 마셨던 때를 기억하며, 새우깡에 막걸리만 있어도 즐거웠던 때를 회상하며, 그렇게 돼지고기 냄새 풀풀나는 대포집으로 그들은 기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힘도 좋으셔라.
지난해 1월 2일에 입사했으니 만 1년 된 신참들이다. 아니 후임을 맞은 입장에서 보면 신참이란 말이 꽤 귀에 거슬릴 터. 조직 생활을 해봤다면 ‘후임’에 대한 열망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단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슬슬 학생티를 벗고 직장인 생활에 걸맞는 대화를 해보고자 처음부터 ‘돈’이라고 쓰여진 이야기 뚜껑을 열었다. 이야기 뚜껑 안에 돼지고기가 맛깔스럽게 들어간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윤상권/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것 같더라. 형은 어때?(상권씨 옆에 지훈씨가 앉았다)
이지훈/ ...
할 말이 별로 없나 보다. 증권사의 특성상 매일 돈과 씨름해야 하는 직업이라 그런지 지훈씨는 술잔 부딪히고 나서 말문을 열었다.
이/ 증권에 대해 너희들이 잘 아는 진 모르지만, 증권사는 조금 각박함이 있어. 매일 상관이건 부하건 하루 성과를 체크하거든. 네트워크로 모두 체크할 수 있다는 얘기지. 상사가 부하보다 성과를 못냈을 때를 생각해봐. 암담하지. 그게 사회인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지훈씨는 취재 내내 말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핵심에 잡히는 말들이 많았으니, 막판에 내뱉은 그의 ‘명언’을 유심히 살펴보시라. 소주가 한잔씩 돌아갔을 때 준원씨가 입장했다. 보스같은 이미지로 “약간 멋쩍다”며 취재에 응하기 싫은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보는 사람 앞에서 뭔가 연출된 이미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 같아 두려웠으리라.
우스갯소리지만 시종 그들은 ‘아부성 발언이 하늘을 찌르네’ ‘이거 녹음시키면 안되요’ ‘그런말 하면 타격입을 걸’ 등등 신세대만의 특별한 멘트가 줄을 이었다. 뭔가 멋쩍은 분위기를 돋우고자, 기자가 질문을 이어갔다.
기자/ 자주 만나세요? 입사한 지 1년 밖에 안됐으니 자주 만날 수 있지 않아요?
최준원/ 아뇨. 처음 분과에서 헤어질 때만 해도 매달 만나자 그랬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지금까지 네 다섯번 봤나? 아마 그랬을 겁니다.
상권/ 처음에는 자주 만날 줄 알았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오늘 1년만에 처음 만나는 동기도 있으니까요. 이런 자리가 마련돼 만날 수 있으니 더욱 좋죠.
윤상준/ 이 자리는 근데 말야. 할 얘기는 하는 자리 아냐?
최/ 할 얘기는 해. 괜찮을 걸? 크크.
이들이 속했던 분과는 신입사원 연수에서 꼴등을 차지했더란다. 1등보다 더 추억이 많은 것이 꼴등 아니던가. 그래서 그들은 허울없이 말들을 이어나갔다. 주위가 시끄러워 그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내용을 주워담으니 오로지 ‘여자’와 ‘일’에 국한돼 있었다.
아~ 여자! 그렇다. 사내 넷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노대통령의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겠는가, 한나라당과 대선자금비리에 대한 속풀이를 하겠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총각들의 최대 키워드는 바로 ‘여자’였다. 처음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젓가락으로 고기만 튕기는 사람도 보였고,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는 사람도 있었는데, 주제가 여자로 넘어가니 참기름 바른 후라이팬처럼 맨들맨들하게 기름진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이지훈/ 니들 없어?
상권/ 형은 있어?
이지훈/ 크크...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상권/ 오호~ 있구만~
최/ 난 올해 결혼하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 직장 들어가니까 깨지고 못하게 됐지뭐.
상준/ 예전에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었는데 여자친구 사귀니깐 그런 게 싹 없어지더라고. 학창 시절에 직장인이 되면 여자 친구부터 사귀겠다는 꿈을 이뤄낸 셈이지. 비록 1년 지나서 이뤄진 것이지만 말야. 으하하하.
이/ 여자고 뭐고 난 빵구난 카드값 메꾸는거 급하다.
상권/ 난 아픔이 있었지. 더 이상 묻지마.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 우리 동기 중에 김모시기라고 있잖아. 갸가 아마 여자 많을 걸?
상준/ 정말야? 김모군에게 잘 보이면 되는 거네? 크크.
상권/ 난 길에서 한번 꼬셔봤는데, 그러더라고. 놀아주지 않으면 때릴 것 같았다고. 크크.
최/ 길에서 꼬셔? 보통 소개팅을 하는데... 아 결혼하고 싶다.
상준씨의 이상형은 탤런트 유민이고, 준원씨는 영화배우 손예진, 지훈씨는 리포터 서민정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연애 결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주제가 ‘여자’로 바뀌자 이야기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상준씨는 여자친구 생긴 이래 연예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했다. 이 때, 우리가 앉은 자리 건너편에 여자들만의 저녁식사 테이블에 대고 누군가 이렇게 조용히 외쳤다. “옆에 여자만 넷이다.”
상준/ 사랑이란 건 그런 것 같아. 상대방이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거 아냐?
최/ 그렇지. 생각을 공유하고 양보하면서 맞춰가는 거지.
상권/ 나이가 어린 여자들은 대체로 좀 집착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기도 해.
여자가 최대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나이. 그러나,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학창 시절이 그리울 수도 있을 텐데... “학창생활이 그립지 않냐”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최/ 방학이 정말 그리워. 그립지 않아?
상권/ 그리워 죽지. 학생 때는 직장인 되고 싶었는데 말야.
상준/ 정말 주말에는 일 때문에 잠을 못잘 때가 많어.
최/ 오호~ 이거 너무 심한거 아냐? 이거 취재한다고 아부성 멘트로 너무 가는거 아냐? 하하하
상권/ 오호~ 진짜? 이거 녹음된다고 이럴 수 있는 거야? 하하하
상준/ 아니. 진짜 일요일 저녁에 그런 기분이 들더라니까.
이/ 혹시 평소에는 잘 자고 주말에만 못자는 거 아냐? 크크. (모두들 웃음보가 터진다.)
상준/ 그래도 주위에서 ‘요즘 뭐하냐’고 물을 때, 자랑스럽게 ‘저 SK 다녀요’할 때 가장 자랑스럽지 않아?
최/ 맞아. 그렇긴 해. 그래도 직장 생활에 있어 규율이라는 것이 못느끼던 것이라 그런지 때때로 답답하기도 해. SK의 이미지가 깨끗하고 세련됐다는 이미지가 직장생활에서 느끼는 비애같은 것들을 대체로 덮어주긴 하지만 말야.
상권/ 난 기술직으로 입사해서 다른 계열사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항상 현장에 있다 보니 여자 구경 좀 했으면 좋겠어. 크크. 우린 아침 6시반까지 출근이야.
이/ 와우. 난 할 말 없네. 나도 일찍 출근한다고 여겼는데 말이지.
술잔이 모두 다섯 번 이상 돌아간 듯 하다. 어림잡아 각자 1병 남짓 마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지훈씨는 이미 얼굴이 빨개져 있다. 덩치가 있어 보이는 상권씨는 술을 잘할 것 같았다. 기자가 사진을 찍는 사이 자기들끼리 수군댄다.
“이거 잘 찍힐까?크크” “표정관리 좀 해” “그게 뭐야. 나처럼 해봐” “괜히 웃는 척도 좀 하고” “즐거운 표정을 지으라니깐.흐흐” “이거 윗분들도 보시는 거라며”
상권/ 패기 알지? SK의 패기 세 가지.(상권씨가 SK 패기 세 가지에 대해 줄줄 읊었다. 이 때 모두 환호성이 터졌다)
이/ 오호. 대단한데. 난 처음 들었어. 크크
기자가 유치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SK에 입사해서 좋은 점은 뭔지에 대해. 그러나, 어쩌면 윗분(?)들이 궁금해 하는 점일 지도 모르는 질문이다.
상준/ 실무자의 의견을 많이 반영된다는 거죠. H모사나 L모사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해요.
상권/ S모사와 비교하면 이거 안될 테지만, 우리 회사만의 분위기가 있어요. 개개인의 능력을 매우 중요시 여겨주는 것이 좋죠.
최/ 예를 들어 하나의 주제를 놓고 볼 때, S모사는 ‘꼭 해와라’는 주문을 던지는데, 우리 회사는 일단 가능성을 타진한 후에 일에 임한다는 게 차이죠. 복장도 우리 회사가 제일 먼저 자유롭게 풀었잖아요. 창의적인 면을 매우 존중해주는 것 같아요.
상준/ 어떻게 보면 정글과도 같기도 해요. 1년차 때부터 바로 현장에 투입되니까. 그래서 인턴 생활을 겪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SK 뿐만 아니라 어떠한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인턴 생활을 하는 게 큰 도움이 되는 듯 합니다.
이/ 입사하고 나서 이 사회가 정말 경쟁 사회이고 ‘치열하구나’를 느껴요.
상권/ 맞아. 치열해.(다소 씁쓸한지 이 때 술잔이 한번 오간다)
술기운이 온 몸에 퍼지고 이야기가 무거웠는지, 누군가 별명을 부르는 듯 했다. “터미네이터”라는 상권씨의 별명은 분과회 시절, 팀장이어서 지어진 별명이란다. 지훈씨는 생김새를 보고 ‘김진수’라고 했고, 상준씨는 ‘청담동 호루라기’, 준원씨는 ‘푸우’라 했다. 모두 생김새에서 따온 듯 한데, 정말 비슷했다.(사진 참고)
이/ 저는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비군 훈련처럼 말예요. 동기들과 1년에 한번씩 3박 4일 정도 합숙하는 거. 어때?
별명 이야기 하다 말고 갑자기 지훈씨는 예비군 훈련이 그리웠는지 이러한 얘길 꺼냈다. 좋은 발상이다. 그러나, 이뤄질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만큼 직장 생활 1년 동안 학창시절 동문들, 그리고 직장 새내기 동기들과의 편안함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혹, 이러한 자리를 맞다보니 무의식중 가슴 속 깊은 곳에서 情이 꿈틀대며 ‘살아있음’을 증명시키려고 내뱉은 것인지도.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맛좋은 김치찌개에 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한 숟가락 입에 넣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서로 숟가락 들고 술잔을 돌리니 이야기 또한 처음 그 주제로 돌아갔다.
최/ 돈과 시간은 반비례하는 것 같아.
상권/ 난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여가 생활인 것 같아. 하도 스노우보드를 좋아해서 야간에 무주까지 갔다가 새벽에 올라와 출근하고 그런다니깐.
(다들 대단하다는 눈치로 쳐다본다.)
상준/ 지금은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고, 학창 시절엔 시간은 많은데 돈은 없고... 뭐 그런거 아닌가? 여가가 참 중요하지.
아르바이트로 사회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생활 1년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들은 이제 2년차다. 새로운 희망의 언저리에서 SK를 짊어질 미래의 주역들이다. 후임 SK맨들을 다그치고 선임 SK맨들에게 충성을 다하며 2004년을 살아가는 그들은 ‘꿈 많은 젊은이’다. 상준씨는 “자기 분야의 최고가 되고 싶다”고 했다. 상권씨는 “영업직을 경험해 보고 싶다”고 했다. 준원씨는 “현재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한 성과가 조금 보였으면 좋겠다”는 조그마한 포부를 밝혔다.
그렇다면 지훈씨는 어떠한 포부와 꿈을 갖고 살아갈까. 이때 박장대소한 말을 던졌으니, 바로 “SK에 이름 석자를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난리가 났다. ‘아부성 발언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식의.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했다. 지훈씨의 이름이 새겨지지 말란 법 없다. 부디 그들이 뿌린 오늘의 미소가, 그들이 나눈 오늘의 情이, SK의 초석이 되어 먼 훗날 길고 깊게 새겨지길 기대한다.
# 에필로그 - 무협 활극의 예비 주인공 4인방
윤상권씨는 새내기 시절 자신의 키를 비유해 농구선수로 동기들을 속였다 한다. SK 나이츠에서 방출돼 그룹으로 오게 됐다고. 우스갯 소리지만 다들 믿었다고 한다. 키가 마이클 조던 보다 1cm 모자란 196cm다. 보통 버스를 타도 뒤로 들어가기 힘들 만 하다. 운동을 좋아할 만 하다. 보드 매니아라 일컫는 상권씨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확고함이 있어 당차 보이기까지 했다.
상권씨 뿐만 아니라 모두들 현재 경제 난국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어 그런지, 4인방의 만남은 시종 유쾌했다. 무협 활극과도 같은 정치판과 경제판의 소용돌이와는 다소 거리가 먼 주제를 택해 이야기를 나눴던 탓인지도 모르나, 직장 생활 1년 차에 느끼는 것들은 인생 선배들도 잘 알듯이 어려울 것이 없는 시기다.
무조건 당차고 겪어보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에 벅차 있던 때다. 뭐든 될 것 같았고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때. 그 가운데 ‘희망’은 하루를 버티는 버팀목이었다. 꿈이 사라져 버린 지 이미 오래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창 밖의 무협 활극 때문에 머리가 팽팽 돌 지경인 사람이 있다면, 풋풋함이 묻어나던 그 때를 기억하자. 새내기 시절 돈에 얽매이지 않고 주머니에 만원만 있어도 즐거운 술자리에 낄 수 있었던 그 때를 말이다.
2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