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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bility/수필

할머니와 나 - 2000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셨다.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예 살 작정으로 오셨다.

개인적으로 할머니에게 은혜를 많이 입은 터라, 너무 반갑고... 안쓰럽고... 죄송스럽고... 복합적인 감정이 한 순간이 일었다.

자식이 많으면 뭐하냐고, 늙어 사라지면 그 뿐인데, 내 몸뚱아리 하나 죽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할머니.
역시 우리 어머니는 천사였던가.

다른 아들 딸들에게 버림받은 우리 할머니의 최종 목적지는 우리 집이었다.
친할머니는 아니지만, 내겐 세상에 그 무엇보다 소중한 분이시다.
어린 시절, 그 분이 없었다면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 숨쉬고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던져질 만큼 그 분은 내게 소중하다.

어제,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들뜬 기분으로 집안 식구들이 모두 집을 비운 사이,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누워 계셨다. 말벗도, 밥 한끼도 제대로 드시지 못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내가 집에 있게 됐고 할머니의 병명과 병치레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당뇨.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으며 소변만 자주 마렵고, 온 몸이 저려진다는 만병. 만성적인 병이라 치료를 꾸준히 하지 않으면 결코 낫지 않는 병.

의학상식을 제대로 지닌 것도 아니지만, 난 무턱대고 섬유질이 좋을 거란 생각에 사과 반개를 깍아 믹서기에 갈고, 요쿠르트, 우유 등을 넣어 "탄수화물은 당을 만들어내니까 이런 것만 드세요"라고 했다.

매일 아침 사과를 깍아 갈아드릴 심산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요쿠르트 큰 것도 한달치 끊고, 당근쥬스며 토마토 쥬스 등 섬유질이 가득한 음식들로 냉장고를 채웠다.

내 돈으로 그런 것을 사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쉬운 일이지만, 어디 그게 쉽게 이뤄지는가.

매일 밥만 드시는 것이 안쓰러워 떡볶이를 해 드렸다.
여자친구의 솜씨를 빌었지만, 할머니는 못내 흐뭇한 표정이시다.

손발이 아파 죽겠다는 말씀을 연거푸 늘어놓으시면서도 손자가 만들어 낸 음식을 드셨으니 심히 기특했으리라.]

"할머니 당근 쥬스, 이거 좋은 거예요. 이젠 물 대신 이거 드세요. 냉장고를 열고 물드시지 말고, 이런 것만 드세요. 아셨죠?"

인터넷을 뒤졌다.
당뇨에 대한 모든 상식과 치료법, 식이요법에 대해 알아냈다.

알고 있던 상식과 다소 거리가 먼 것도 있었지만, 대략 잡곡밥에 섬유질 가득한 음식과 '크롬'이 특히 좋다 한다. 크롬은 치즈, 우유에 많이 함유돼 있다는데, 우유를 드시면 설사를 하시니 할 수 없이 치즈를 드시는 수 밖에.

언제 나으실려나.
올 연세 일흔다섯.

매번 나를 볼 때마다 "죽어야 하는데... 죽지도 않으니"라며 안타까와 하시는 할머니.

답답하다.

결심했다.

할머니의 당 수치는 내가 내려놓겠다고.
이젠 내가 갚을 차례다...
 
 

 


 

할머니는 2006년 세상을 떠나셨다.

 

이 글을 다시 보니 할머니가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