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문학사상 신인상> 작품 공모작 '권태(倦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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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몸과 마음이 피로하여 나른함 ②시들한 마음에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재혁은 짧은 생을 살고 간 이상(李箱)의 '권태'를 일어나며 되집어냈다. 어제 읽었었지. 어제 그렇게 잠이 든 재혁에겐 제일 먼저 일어나자마자 해야 할 일이 '권태' 라는 말의 의미를 찾는 일. 그것이었다. 재혁은 어제 늦게까지 읽고 그대로 잠이 들며 생각을 했다. 내일 찾아봐야겠다. 사전엔 짧은 외마디로 그 수 많은 감정의 갈등과 핏줄서린 눈망울들을 적셔놓고 있었지만, 재혁은 사전을 덮으며 입가에 쓴내를 풍길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들한 마음에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음...그건 아냐.
오전 7시 30분. 정확히 눈을 뜬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시계다. 제일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놨다. 그래야 아침을 여유있게 맞이할 수 있기 때문에. 눈을 오른쪽으로 약간만 틀면 책장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책장이 마을의 수호신인 '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 하는 장승같다. 눈을 돌리지 않고 바로 고개를 틀고 침대에서 일어서면, 재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돈을 주고 사온 갖가지 물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책상엔 책이 많이 꽂혀 있는 것은 아니다. 재혁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글씨가 작은 책을 일생을 통털어 읽어본 적이 없다.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소설이라든지, 셰익스피어의 소설류 같은 고전은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눈을 비비며 손은 으레 이력서로 간다. 볼펜도 없이 외롭게 밤을 지새운 이력서는 어제 그대로 책상위에 널브러져 있다. 눈을 크게 뜨며 흰자위를 거울에 가져가 본다. 손으로 툭툭. 두어번 눈가를 친다. 더 이상 볼 것이 없다. 내 얼굴엔. 재혁은 이력서를 만지작 거리다 창문을 연다. 밤새 잠기운으로 빠져나간 공기가 매캐하기까지 하다. 새벽은 아니지만, 제법 상쾌한 공기가 재혁의 코를 스치고 지나간다. 후훗. 아침은 항상 이런 감정으로 맞이해야 함을 알면서도 재혁에겐 항상 이 시간이 밤이었다.
재혁은 밤이 아침으로 이어져야만 잠이 들곤 했다. 그런 인생을 살지 말자고 다짐을 해도 생체리듬은 그를 굳게 가둬두고 있는 모양이다. 두어시간. 꼭 그렇다. 두어시간만에 잠을 깬다. 눈가를 한번 훔치고는 이내 다시 잠든다. 세시간정도? 다시 눈을 뜨면 말그대로 해가 중천에. 재혁은 하루의 반을 보냈다고 생각을 한다. 우습게도... 이런 식으로라도 하루의 반을 보낸 기분이 어떠냐고 누가 묻는다면 항상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재혁은 준비해 놓은 말이 있다. 그래야 살아 라고.
재혁은 오늘 왜 일찍 일어났을까. 자신도 잠시 잊은 듯이 창밖의 해를 빤히 쳐다본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항상 까만색만 보였는데, 해를 보며 눈을 감으면 색은 빨강이다. 여지없이 빨강. 벌써 세달째다. 이런 버릇이 생긴게. 아침에 빨강을 보면 항상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재혁은 그 빨강이 항상 행운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으며 오늘도 눈을 감았던 것이다. 눈을 뜬다. 빨강에서 하얀색으로 갑자기 변화가 온다. 눈가를 찌푸린다. 고개를 돌려 담배를 본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재혁은 멍하니 방안에 걸려있는 영화 포스터를 쳐다본다. 'THE GRAND BLEU'. 하얀색에서 눈이 제 빛을 찾을때쯤 재혁의 눈에 들어온 색은 파랑이다. 넘실대는 파도. 그 파도에 실린 자신을 상상해 본다. 갈 수 없는 곳을 상상하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어딨겠는가.
담뱃불을 끄며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가는 길이 천리만리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가지 못한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밤새 말랐던 목을 축이고, 싱크대 위에서 손을 씻는다. 화장실을 들어가 씻어도 되건만 꼭 싱크대에서 씻는다. 이번엔 마루에 걸려있는 전신거울이다. 입을 크게 벌려본다. 혓바닥을 내밀어본다. 그리고는 권투선수처럼 잽을 날려본다. 폼이난다. 재혁은 나두 왕년에 좀 했어 라는 식의 얼굴로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방안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시간은 대략 30여분 걸린다.
이번엔 화장실안의 거울이다. 다시한번 힘을 준다. 티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는다. 몸에 힘을 준다. 몸에 잔뜩 힘을 줘도 누가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재혁이다. 욕조 하수구를 쳐다본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되어 저 속으로 들어가자. 어린 시절 누구나가 한번쯤은 타봄직한 미끄럼틀을 생각한다. 미끄럼틀. 그래, 미끄러지며 사는 인생.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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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몸과 마음이 피로하여 나른함 ②시들한 마음에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재혁은 짧은 생을 살고 간 이상(李箱)의 '권태'를 일어나며 되집어냈다. 어제 읽었었지. 어제 그렇게 잠이 든 재혁에겐 제일 먼저 일어나자마자 해야 할 일이 '권태' 라는 말의 의미를 찾는 일. 그것이었다. 재혁은 어제 늦게까지 읽고 그대로 잠이 들며 생각을 했다. 내일 찾아봐야겠다. 사전엔 짧은 외마디로 그 수 많은 감정의 갈등과 핏줄서린 눈망울들을 적셔놓고 있었지만, 재혁은 사전을 덮으며 입가에 쓴내를 풍길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들한 마음에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음...그건 아냐.
오전 7시 30분. 정확히 눈을 뜬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시계다. 제일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놨다. 그래야 아침을 여유있게 맞이할 수 있기 때문에. 눈을 오른쪽으로 약간만 틀면 책장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책장이 마을의 수호신인 '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 하는 장승같다. 눈을 돌리지 않고 바로 고개를 틀고 침대에서 일어서면, 재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돈을 주고 사온 갖가지 물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책상엔 책이 많이 꽂혀 있는 것은 아니다. 재혁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글씨가 작은 책을 일생을 통털어 읽어본 적이 없다.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소설이라든지, 셰익스피어의 소설류 같은 고전은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눈을 비비며 손은 으레 이력서로 간다. 볼펜도 없이 외롭게 밤을 지새운 이력서는 어제 그대로 책상위에 널브러져 있다. 눈을 크게 뜨며 흰자위를 거울에 가져가 본다. 손으로 툭툭. 두어번 눈가를 친다. 더 이상 볼 것이 없다. 내 얼굴엔. 재혁은 이력서를 만지작 거리다 창문을 연다. 밤새 잠기운으로 빠져나간 공기가 매캐하기까지 하다. 새벽은 아니지만, 제법 상쾌한 공기가 재혁의 코를 스치고 지나간다. 후훗. 아침은 항상 이런 감정으로 맞이해야 함을 알면서도 재혁에겐 항상 이 시간이 밤이었다.
재혁은 밤이 아침으로 이어져야만 잠이 들곤 했다. 그런 인생을 살지 말자고 다짐을 해도 생체리듬은 그를 굳게 가둬두고 있는 모양이다. 두어시간. 꼭 그렇다. 두어시간만에 잠을 깬다. 눈가를 한번 훔치고는 이내 다시 잠든다. 세시간정도? 다시 눈을 뜨면 말그대로 해가 중천에. 재혁은 하루의 반을 보냈다고 생각을 한다. 우습게도... 이런 식으로라도 하루의 반을 보낸 기분이 어떠냐고 누가 묻는다면 항상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재혁은 준비해 놓은 말이 있다. 그래야 살아 라고.
재혁은 오늘 왜 일찍 일어났을까. 자신도 잠시 잊은 듯이 창밖의 해를 빤히 쳐다본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항상 까만색만 보였는데, 해를 보며 눈을 감으면 색은 빨강이다. 여지없이 빨강. 벌써 세달째다. 이런 버릇이 생긴게. 아침에 빨강을 보면 항상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재혁은 그 빨강이 항상 행운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으며 오늘도 눈을 감았던 것이다. 눈을 뜬다. 빨강에서 하얀색으로 갑자기 변화가 온다. 눈가를 찌푸린다. 고개를 돌려 담배를 본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재혁은 멍하니 방안에 걸려있는 영화 포스터를 쳐다본다. 'THE GRAND BLEU'. 하얀색에서 눈이 제 빛을 찾을때쯤 재혁의 눈에 들어온 색은 파랑이다. 넘실대는 파도. 그 파도에 실린 자신을 상상해 본다. 갈 수 없는 곳을 상상하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어딨겠는가.
담뱃불을 끄며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가는 길이 천리만리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가지 못한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밤새 말랐던 목을 축이고, 싱크대 위에서 손을 씻는다. 화장실을 들어가 씻어도 되건만 꼭 싱크대에서 씻는다. 이번엔 마루에 걸려있는 전신거울이다. 입을 크게 벌려본다. 혓바닥을 내밀어본다. 그리고는 권투선수처럼 잽을 날려본다. 폼이난다. 재혁은 나두 왕년에 좀 했어 라는 식의 얼굴로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방안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시간은 대략 30여분 걸린다.
이번엔 화장실안의 거울이다. 다시한번 힘을 준다. 티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는다. 몸에 힘을 준다. 몸에 잔뜩 힘을 줘도 누가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재혁이다. 욕조 하수구를 쳐다본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되어 저 속으로 들어가자. 어린 시절 누구나가 한번쯤은 타봄직한 미끄럼틀을 생각한다. 미끄럼틀. 그래, 미끄러지며 사는 인생.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