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만 뒀지. 돈이면 다가 아니라는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 나에겐 큰 변화였지. 날 보살펴 주던 그 아저씨가 병이 드셨어. 그러나 그 때, 돈을 많이 까먹은 나에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날 믿으셨거든.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옳은 일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계셨었나봐. 아저씬 나에게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다 해주신 그런... 나에겐 없으면 안 될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그 때의 나로선 이해를 못했었지. 아저씨의 그런 믿음을 말야. 그러던 아저씨가 많이 숨에 가빠하시며, 어느 날인가 이런 말씀을 하셨드랬어. 사람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남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과 정뿐이라고. 난 그 말을 듣고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이 울었지... 그 날밤... 아저씬 돌아가셨고 춘천으로 가시면서도 아저씬 흐뭇하셨을 게야. 사람들의 정을 느끼고 가셨으니깐 말야. 물론, 내 정도 한아름 안고 가셨을 거라. 난 그 때까지 사회에 대한 적대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차있던 때라 뭐라 말할 수 없는 서글픔들이 밀려왔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내 인생문제의 해답을 너무나도 멀리가서 찾아다닌 게야. 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내는 약간 거무스레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수가 볼 때, 그 사내가 고개를 숙이면 우는지 웃는지 분간이 쉽게 가지 않는 그런 얼굴이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손에 때가 많이 끼여 있었고, 머리도 감지 않았는지 푸석해 보였다. 그러나, 역시 광수에겐 그 사내가 이런 곳 사람같진 않다고 여겨졌다.
"그런 서글픔들을 알고는 돈이 다가 아니구나하고 느꼈다. 사람들과의 정이 나에게도 있었구나하고 느끼니깐, 왜 그렇게 세상이 다시 보이던지. 남을 비판하고, 세상을 시험했던 나에게도 정을 준 사람들이 있고, 내가 나 자신도 모르게 정을 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더 이상 외롭지도, 세상이 각박하지도 않더라구. 그 후로 내가 할 일이 뭔가를 생각했고 알아냈다. 정을 만들고 믿음을 키우고하는, 그간 버리고 떨궈 온 그런 것들을 주워 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난 재산을 정리해서, 하나의 쉼터를 만들려 한다. 지금은 거지생활이지만 곧 소장소릴 듣겠지. 20년 동안 계속해 온 일이라 그만 할 수가 없더라고. 껄걸. 내가 만드는 쉼터는 정이 흐르고, 좋은 기억들만 담을 수 있는 사람들만 오는 곳이 될게야. 사람에게 정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에게 정을 줄 수도 있고. 그런 곳으로 만들거다. 정을 만드는 곳이라고 해야 하겠지?? 후훗. 근데말야, 그... 건축 설계부터 시공하는 데도 썩은 곳이 보이더라구...썩을 놈들...하하하."
"후훗."
오랜만에 그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연신 묵묵하던 얼굴 표정 또한 활짝 펴진 듯 했다.
그 사내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광수는 따뜻함을 느꼈다. 영상이니, 영하니 하는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4월의 어느 새벽이었지만, 그 사내와의 만남은 정말 따뜻했다. 장애자라는 것에 광수도 어느 정도는 경계심을 늦췄으리라. 아마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획일적 일변도일 것이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것이 인간이니까. 하지만, 강자에겐 강하려 했고, 약자에겐 약하려 했던 그의 말들을 느낀 광수의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광수가 그렇게 오래 같이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사내의 진실어린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 그렁그렁한 눈동자에 매료됐을까.
"많이 추워졌네 그려. 내 애길 이렇게 끝까지 들어 준 사람은 아마 광수 자네가 처음일거네. 고맙네 그려. 난 얘길 하고 싶었어. 누구와라도 말이지. 그렇게 아저씨가 떠나고 난 뒤에 그저... 난 대화를 나누고 정을 느끼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더라고."
'그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 사내는 그저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정은 절로 드는 것이니까.
"내가 말을 붙이면 가더라고. 몇마디 운을 띄우면 영락없이 시간없다고 하면서 가더라고. 후훗... 누가 잡아 먹기라도 하나. 이런 꼬라질 해가지구 어디 강도짓이나 하겠냐 말이다. 근데들 다 가더라구. 생각해 봐라. 장애인이 강도요, 살인했소 하는 소리 들어 본 적 있나? 자네? 우리들은 그렇게 하질 못해. 아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가장 선할 지도 모르네. 그렇게 선한 사람들이 제일로 바라는 것이 정이라면 믿겠나? 일반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정... 말이지. 정..."
광수는 뭔가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광수가 느낀 것은 그런 것 말고도 얘기가 끝나 갈 무렵부터 경상도 사투리가 줄었다는 데 있다. 자리를 털며 느낀 것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난 오늘 자넬 만났네. 이런게 정일게야. 별거 아냐. 정이란건. 이렇게 만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자신이 살아온 얘길 하며 함께 웃으면 그게 정인게야. 믿음이고. 자넨 내 애길 끝까지 들어줘서 날 믿은게고, 난 자네가 믿으니 나도 자넬 믿는 게고. 난 그걸 몰랐어. 그래서 세상을 증오했었지. 정... 후훗. 자네도 오늘 느꼈으리라고 믿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하는데 말야. 허허."
그 사내는 엉거주춤하며 일어서는 데 나 자신도 모르게 팔을 부축했다. 그 사내는 그렇게 돌아서서 빈 소주병을 들고는 절룩거리며 지하도의 끝을 찾아 가는 듯 했다. 그 사내가 가면서 남긴 말은 광수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 같다. 숨이 찼던지 잠깐잠깐 쉬며 했던 말들을.
"세상이 우릴 미워하는게 아닌게야.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 가고 있으면서. 세상에 있으면서. 또, 그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 가면서 우리는 그런 세상에 있다고 얘길 하지. 그런 세상은 어디서 왔는데.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다 우리들이 만들어 왔고, 만들어 가는게야. 남의 집을 만드는 건축가가 자신의 집을 탓하믄 뭐하겠나. 예전에 우리 힘들었던 때를 기억해야 해. 그 때처럼 우린 서롤 도와야 해. 서롤 믿어야 해. 그런 정만이 우릴 지켜주고 삭막한 현실을 뎁혀 줄게야. 내가 아저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듯이 자네도 구만리 같은 앞날을 잘. 한번 생각해 보게나. 자네도 그러길 바라네. 이젠 가봐야 겠네. 언제 지나다가 보면 그 땐 내가 정에 가득찬 모습일게야. 정에 굶주린 거지 꼴이 아니고. 후훗... 그리고, 여기. 약속대로 만원을 주겠네. 이건 약속이니깐."
광수는 그 돈을 쓸 수가 없었다. 만원을 받은게 아니었다. 값으로 매김할 수 없는 액수였다. 광수는 그 만원을 들고 한참을 그 지하도에 서 있었다. 여느때와는 다른 듯한 새벽공기가 지하도 밖에서 광수에게 불어왔고, 저 멀리서 상쾌한 안개를 헤치고 달리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후기 : 무슨 내용으로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졸작이다. 그러나 내게 소중하다. ^^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내는 약간 거무스레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수가 볼 때, 그 사내가 고개를 숙이면 우는지 웃는지 분간이 쉽게 가지 않는 그런 얼굴이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손에 때가 많이 끼여 있었고, 머리도 감지 않았는지 푸석해 보였다. 그러나, 역시 광수에겐 그 사내가 이런 곳 사람같진 않다고 여겨졌다.
"그런 서글픔들을 알고는 돈이 다가 아니구나하고 느꼈다. 사람들과의 정이 나에게도 있었구나하고 느끼니깐, 왜 그렇게 세상이 다시 보이던지. 남을 비판하고, 세상을 시험했던 나에게도 정을 준 사람들이 있고, 내가 나 자신도 모르게 정을 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더 이상 외롭지도, 세상이 각박하지도 않더라구. 그 후로 내가 할 일이 뭔가를 생각했고 알아냈다. 정을 만들고 믿음을 키우고하는, 그간 버리고 떨궈 온 그런 것들을 주워 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난 재산을 정리해서, 하나의 쉼터를 만들려 한다. 지금은 거지생활이지만 곧 소장소릴 듣겠지. 20년 동안 계속해 온 일이라 그만 할 수가 없더라고. 껄걸. 내가 만드는 쉼터는 정이 흐르고, 좋은 기억들만 담을 수 있는 사람들만 오는 곳이 될게야. 사람에게 정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에게 정을 줄 수도 있고. 그런 곳으로 만들거다. 정을 만드는 곳이라고 해야 하겠지?? 후훗. 근데말야, 그... 건축 설계부터 시공하는 데도 썩은 곳이 보이더라구...썩을 놈들...하하하."
"후훗."
오랜만에 그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연신 묵묵하던 얼굴 표정 또한 활짝 펴진 듯 했다.
그 사내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광수는 따뜻함을 느꼈다. 영상이니, 영하니 하는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4월의 어느 새벽이었지만, 그 사내와의 만남은 정말 따뜻했다. 장애자라는 것에 광수도 어느 정도는 경계심을 늦췄으리라. 아마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획일적 일변도일 것이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것이 인간이니까. 하지만, 강자에겐 강하려 했고, 약자에겐 약하려 했던 그의 말들을 느낀 광수의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광수가 그렇게 오래 같이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사내의 진실어린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 그렁그렁한 눈동자에 매료됐을까.
"많이 추워졌네 그려. 내 애길 이렇게 끝까지 들어 준 사람은 아마 광수 자네가 처음일거네. 고맙네 그려. 난 얘길 하고 싶었어. 누구와라도 말이지. 그렇게 아저씨가 떠나고 난 뒤에 그저... 난 대화를 나누고 정을 느끼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더라고."
'그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 사내는 그저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정은 절로 드는 것이니까.
"내가 말을 붙이면 가더라고. 몇마디 운을 띄우면 영락없이 시간없다고 하면서 가더라고. 후훗... 누가 잡아 먹기라도 하나. 이런 꼬라질 해가지구 어디 강도짓이나 하겠냐 말이다. 근데들 다 가더라구. 생각해 봐라. 장애인이 강도요, 살인했소 하는 소리 들어 본 적 있나? 자네? 우리들은 그렇게 하질 못해. 아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가장 선할 지도 모르네. 그렇게 선한 사람들이 제일로 바라는 것이 정이라면 믿겠나? 일반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정... 말이지. 정..."
광수는 뭔가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광수가 느낀 것은 그런 것 말고도 얘기가 끝나 갈 무렵부터 경상도 사투리가 줄었다는 데 있다. 자리를 털며 느낀 것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난 오늘 자넬 만났네. 이런게 정일게야. 별거 아냐. 정이란건. 이렇게 만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자신이 살아온 얘길 하며 함께 웃으면 그게 정인게야. 믿음이고. 자넨 내 애길 끝까지 들어줘서 날 믿은게고, 난 자네가 믿으니 나도 자넬 믿는 게고. 난 그걸 몰랐어. 그래서 세상을 증오했었지. 정... 후훗. 자네도 오늘 느꼈으리라고 믿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하는데 말야. 허허."
그 사내는 엉거주춤하며 일어서는 데 나 자신도 모르게 팔을 부축했다. 그 사내는 그렇게 돌아서서 빈 소주병을 들고는 절룩거리며 지하도의 끝을 찾아 가는 듯 했다. 그 사내가 가면서 남긴 말은 광수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 같다. 숨이 찼던지 잠깐잠깐 쉬며 했던 말들을.
"세상이 우릴 미워하는게 아닌게야.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 가고 있으면서. 세상에 있으면서. 또, 그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 가면서 우리는 그런 세상에 있다고 얘길 하지. 그런 세상은 어디서 왔는데.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다 우리들이 만들어 왔고, 만들어 가는게야. 남의 집을 만드는 건축가가 자신의 집을 탓하믄 뭐하겠나. 예전에 우리 힘들었던 때를 기억해야 해. 그 때처럼 우린 서롤 도와야 해. 서롤 믿어야 해. 그런 정만이 우릴 지켜주고 삭막한 현실을 뎁혀 줄게야. 내가 아저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듯이 자네도 구만리 같은 앞날을 잘. 한번 생각해 보게나. 자네도 그러길 바라네. 이젠 가봐야 겠네. 언제 지나다가 보면 그 땐 내가 정에 가득찬 모습일게야. 정에 굶주린 거지 꼴이 아니고. 후훗... 그리고, 여기. 약속대로 만원을 주겠네. 이건 약속이니깐."
광수는 그 돈을 쓸 수가 없었다. 만원을 받은게 아니었다. 값으로 매김할 수 없는 액수였다. 광수는 그 만원을 들고 한참을 그 지하도에 서 있었다. 여느때와는 다른 듯한 새벽공기가 지하도 밖에서 광수에게 불어왔고, 저 멀리서 상쾌한 안개를 헤치고 달리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후기 : 무슨 내용으로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졸작이다. 그러나 내게 소중하다. ^^
'Sensibility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태2 (0) | 2009.07.01 |
---|---|
권태(倦怠)1 - 1997 <문학사상 신인상> 작품 공모작 (0) | 2009.07.01 |
情7 - 1998 (0) | 2009.07.01 |
情6 - 1998 (0) | 2009.07.01 |
情5 - 1998 (0) | 2009.07.01 |